안산잿머리성황당

한국무속신앙사전
고려시대 서희(徐熙, 942~998)가 송나라 사신으로 가기 전에 제를 지내기 위해 세운 당. 이 당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 산 76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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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서희(徐熙, 942~998)가 송나라 사신으로 가기 전에 제를 지내기 위해 세운 당. 이 당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 산 76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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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선
정의고려시대 서희(徐熙, 942~998)가 송나라 사신으로 가기 전에 제를 지내기 위해 세운 당. 이 당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 산 76에 있으며, ‘안산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용잿머리는 성의 꼭대기에 있다는 뜻으로, 성황사가 있었던 예가 있으므로 이를 중심으로 독자적 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안산잿머리성황제는 일단 용어가 주목된다. 인접한 다른 지역에서는 성황제라는 제의 명칭이 그다지 활발하게 사용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도당굿이나 곶창굿이라는 말 이외에 다른 곳에서 사용하는 대동굿이라는 말도 사용되지 않는다. 안산 잿머리를 비롯해 몇 군데에서만 성황제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어 이점이 각별하다. 안산 잿머리와 유관한 지역에서는 성황제를 사용한다. 구체적으로는 안산 잿머리를 비롯해 시흥 구준물 성황제, 군자봉 성황제 등이다. 이 뿐 아니라 우음도에서도 앞의 두 지역에서 말하는 성황신과 일정한 관련이 있는 신격과 제차가 있다. 안산과 시흥 군자봉, 구준물 성황제 등이 일련의 연계선상에서 독자적인 신앙계보를 형성하고 있다.

잿머리 성황사가 있는 지역은 성황사를 중심으로 성터가 쌓여 있음에 비추어서 이해할 수 있다. 선곡동의 [마을](/topic/마을)은 네 개의 자연마을로 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잿머리라는 마을의 총괄적인 명칭 아래 골[우물](/topic/우물), 벌말, 안말, 도란말 등으로 하위 구성되어 있음으로써 성황당을 신성시해 주변에 단을 쌓고 이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신성한 마을을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네 개의 자연마을 가운데 규모가 큰 마을은 안말과 도란말로 가장 성대했다고 전한다. 안말은 순흥 안씨들이 대대로 세거했으며, 이로 인해 ‘안촌(安村)’이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도란말은 해안가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으로, 바닷물이 이곳에 이르러서 황급하게 돌아가는 데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이 마을을 한자로 표기할 때에는 ‘회촌(廻村)’이라고 한다. 이 지역 김녕 김씨와 남양 홍씨가 대대로 거주한 세거지였으며, 잿머리에 들어온 성씨 순서는 안씨·홍씨·김씨 등으로 되어 있다고 전한다. 마을이 없어지기 전에 가장 번창한 성씨는 김녕 김씨였다고 전한다.

안산은 역사적으로 물화가 번성하고 자연·지리적인 조건 아래 교통의 요충지였다. 제보자들에 의하면 잿머리 아래 갯벌은 황금덩[어리](/topic/어리)라고 표현될 정도로 마을의 주요한 수입원이다. 이 마을은 전적으로 잿머리 마을 아래에 있는 바다에 의존해 갖[가지](/topic/가지) 경제적인 수입원을 조달했다. 역사적으로 안산 잿머리 마을은 일정하게 성씨의 변천을 거치며 성황제를 지내면서 성황제의 내력을 공고히 하는 한편 마을 사람들의 신앙심을 돈독하게 쌓은 것으로 이해된다. 잿머리 성황당이 몇 차례 화재에도 신앙심을 굳게 지켜온 것은 이 마을의 성황신앙에 관한 믿음이 온전한 덕분이라고 현지 전승자들은 말한다.
참고문헌굿과 음식 (김헌선, 문화재청, 2007)
역사안산 잿머리의 제차적 내력은 크게 두 [가지](/topic/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자료가 존재한다. 이를 근거로 제의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인접한 지역인 시흥 군자봉 성황제의 중요성에 입각해 이 제의를 재인식할 수 있다. 시흥 군자봉 성황제의 기록은 『여지도서(輿地圖書)』 안산군 산천조에 비교적 명확하게 예시되어 있는 “군자산은 안산군의 치소 서쪽 20리에 있으며 여기에 성황사가 있다”는 기록이다. 이와 아울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있는 안산군의 사묘조(祠廟條)에 관한 기록이다. “하나는 군의 서쪽 21리, 다른 하나는 군의 서쪽 32리에 위치한다.” 이 두 가지 기록을 검토하면 전자는 영조 33~41년(1757~1765)에 편찬된 것으로 이는 각도의 읍지를 모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완한 것으로 보인다. 시흥 군자봉 성황제의 중요성을 뒷받침하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잿머리 성황은 동일한 기록에서 바다에 대해 “군 서쪽 삼십 리 되는 곳에 있다”라는 말을 들어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성황사가 잿머리 성황임을 명확하게 추론할 수 있다. 성황사의 한 곳이 바로 군 서쪽 32리라고 하는 것과 바다가 동일한 지점에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곳이 분명하게 잿머리 성황사임을 알 수 있게 하는 간접적인 증거가 된다. 이곳의 성황사는 기록에 남을 정도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성황사가 있는 이 [마을](/topic/마을)이 신라시대 이래로 매우 중요한 포구였기 때문이다.

잿머리 성황사의 존재는 1966년 전국 단위의 마을제당 조사 때에도 성곡리 무들마을에 경순왕비를 모신 성황당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성두산 산정에 [초가집](/topic/초가집)으로 지은 당집이 있고, 인근의 신목이 있으며, 군자봉의 성황당과 함께 나란히 기술되어 있다. 그때에도 무신도가 있었다.
민속원제주도무가본풀이사전진성기1991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제주도 무가현용준ㆍ현승환 역주1996
집문당큰굿 열두거리의 구조적 원형과 신화이수자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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