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자인단오제

한국무속신앙사전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과 용성면 일대에서 왜구를 물리친 한[장군](/topic/장군)과 그의 누이의 전승을 기념하고, 이들의 넋을 모시고 위로하기 위해 행하는 축제이자 [마을](/topic/마을) 제사. 1971년 3월 16일에 ‘[한장군놀이](/topic/한장군놀이)’라는 명칭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었고 2007년 3월 12일에 ‘경산자인단오제’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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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과 용성면 일대에서 왜구를 물리친 한[장군](/topic/장군)과 그의 누이의 전승을 기념하고, 이들의 넋을 모시고 위로하기 위해 행하는 축제이자 [마을](/topic/마을) 제사. 1971년 3월 16일에 ‘[한장군놀이](/topic/한장군놀이)’라는 명칭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었고 2007년 3월 12일에 ‘경산자인단오제’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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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과 용성면 일대에서 왜구를 물리친 한[장군](/topic/장군)과 그의 누이의 전승을 기념하고, 이들의 넋을 모시고 위로하기 위해 행하는 축제이자 [마을](/topic/마을) 제사. 1971년 3월 16일에 ‘[한장군놀이](/topic/한장군놀이)’라는 명칭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었고 2007년 3월 12일에 ‘경산자인단오제’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정의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과 용성면 일대에서 왜구를 물리친 한[장군](/topic/장군)과 그의 누이의 전승을 기념하고, 이들의 넋을 모시고 위로하기 위해 행하는 축제이자 [마을](/topic/마을) 제사. 1971년 3월 16일에 ‘[한장군놀이](/topic/한장군놀이)’라는 명칭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었고 2007년 3월 12일에 ‘경산자인단오제’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在庆尚北道庆山市慈仁面和龙城面一带[端午](/topic/端午)时举行的庆典活动兼洞祭。

根据对“慈仁端午祭”的记载,新罗或者高丽时代遇倭寇入侵,韩将军跳女圆舞吸引倭寇的视线,趁此,军士们突袭并击退了倭寇。韩将军过逝后,慈仁当地居民为表达他们对韩将军的景仰之情,建了许多[祠堂](/topic/祠堂),在端午时节举行悼念祭祀活动,在其后三,四天期间举行女圆舞,广大(音)(民间艺人—译注)杂耍,巫俗祭仪,摔跤,[荡秋千](/topic/荡秋千)等多种民俗活动,这就是传承至今的慈仁端午祭的开端。

“韩将军祭”自朝鲜后期开始,由官方主导举行,并发展为民间庆典。由于其社会,文化象征性,在日本占领时期,还成为镇压对象。1971 年以“[韩将军游戏](/topic/韩将军游戏)”为名称,被指定为重要的非物质文化遗产﹐ 2007 年更名为“庆山慈仁端午祭”。

与韩将军有关的洞祭,正月十五在韩将军祠堂或村庄祭堂“韩堂”举行。此外,在松林洞和大宗洞等村庄,为缅怀韩将军,端午时举行“慈仁端午[巫祭](/topic/巫祭)”纪念战胜活动。

活动内容是,首先在韩将军墓举行祭祀,然后有化妆队伍行进。过去还有骑马,射箭,摔跤等活动。化妆队伍行进结束后,还有女圆舞,八广大戏,端午巫祭等活动。

女圆舞是伴随韩将军传说传承了数百年的非物质文化遗产,舞者服饰很特别,在其他地方很难见到,头上的花冠高达三米,全身被五彩裙遮住,会让人联想到巨大的花神。女圆舞中的花冠具有神圣性,因此有很多[禁忌](/topic/禁忌)。

举行端午祭之前,谁都不能接近花冠,但端午祭结束后,男女老少纷纷上去抢花,因为他们相信这花放在家里可以带来丰收,以及消灾,祛病。除此之外,周边还附带进行摔跤,荡秋千等多种娱乐活动。
Gyeongsan Jain Danoje is a village ritual and festival held on Dano, the fifth day of the fifth lunar month, in the villages of Jain and Yongseong in Gyeongsan of North Gyeongsang Province.

According to records, upon Japanese invasion during Silla or Goryeo, a general named Han defeated the invaders by distracting them with a performance of yeowonmu (women’s circle dance), during which soldiers defeated them. Shrines were built around the village upon the general’s death to honor his loyalty and following a memorial rite held in his honor on Dano Day, the villagers commemorated for three to four days with elaborate festivities, including the circle dance, shamanic rituals, clown performances, wrestling and swing riding. This was the origin of today’s Gyeongsan Jain Danoje.

In late Joseon, the celebrations took shape as a government-organized local festivity with the name Hanjanggunje ([General Han Festival](/topic/GeneralHanFestival)) and its socio-cultural significance made it a target of colonial oppression during Japanese occupation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In 1971, the festival was designated by the government as an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and in 2007 its official name was changed to Gyeongsan Jain Danoje.

The village tutelary ritual (dongje) for General Han is held on Jeongwoldaeboreum (Great Full Moon) in the first lunar month, at a village shrine called Hanjanggunsadang (General Han Shrine) or Handang. In villages Songnim and Daejong, the festival Jain Danogut is held on Dano Day as a commemoration of victory and of the spirit of General Han. Festivities include a memorial rite at General Han’s tomb, followed by a costume parade, then women’s circle dance, eight-character play (palgwangdaenori) and the shamanic Dano ritual. In the past, horseback riding, archery and wrestling events were also held.

The circle dance yeowonmu is a centuries-old performing art based on the General Han legend and designated as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The costumes for the dance are unique, including a 3-meter-tall flower crown worn with a five-color skirt, which makes the performer appear to be an enormous flower ghost. Due to its sanctity, there are many taboos associated with the flower crown. No one is permitted to approach the crown prior to the festival, but once the Dano ritual is over, everyone clamors to get a hold of the flowers, for it is believed that carrying them in one’s arms and keeping them at home will bring a good harvest, good fortune and healing.
Festival que se celebra en el día de [[Dano](/topic/festividaddelquintodíadelquintomeslunar)](/topic/Dano), el 5 del quinto mes del calendario lunar en las aldeas de Jain-myeon y Yongseung-myeon de la ciudad de Gyeongsan de la provincia de Gyeongsangbuk-do.

Según los registros, cuando el reino Silla o Goryeo sufría la invasión japonesa, un general llamado Han derrotó a los invasores japoneses. El general intentó distraerlos bailando la danza llamada yeowonmu mientras sus soldados derrotaban a los enemigos. Tras la muerte del general Han, los habitantes de la aldea de Jain construyeron unos santuarios para rendir homenaje a él por su lealtad y realizan un ritual para honrar al general Han en el día de Dano, en el que los aldeanos conmemoran al general Han por tres días disfrutando de diversos eventos como [danza en círculo](/topic/danzaencírculo), rituales chamánicos, actuaciones de payasos, lucha tradicional coreana y juego de columpio. Este fue el origen del festival de Gyeongsan Jain Danoje que se celebra el día de hoy.

A finales de la dinastía Joseon, el gobierno de la dinastía empezaba a organizar la celebración del festival como una fiesta local con el nombre de Hanjanggunje, que significa “festival del general Han”, cuyo significado sociocultural se convirtió en un objeto de la opresión colonial japonesa durante la primera mitad del siglo XX. En 1971, el gobierno coreano designó el festival como patrimonio cultural intangible. En 2007 cambiaron el nombre del festival por Gyeongsan Jain Danoje cuyo nombre original era Hanganggunnori.

El ritual dongje relacionado con el general Han se efectua en el 15 del primer mes del calendario lunar en los santuarios del pueblo llamado Hanjanggunsadang o Handang. En las aldeas de Songnim-dong y Daejongdong se realiza el jaindanogut como una ceremonia conmemorativa del triunfo y el espíritu del general Han.

Las festividades incluyen un rito conmemorativo efectuado en la tumba del general Han y un desfile de disfraces. En el pasado, también se celebraban la equitación y el tiro con arco. Después de la procesión, continúan con la danza en círculo efectuada solo por mujeres, yeowonmu, la actuación de ocho carácteres, palgwangdaenori y el ritual chamánico realizado en el día de Dano, danogut.

La danza en círculo fue designada como patrimonio cultural intangible de Corea por ser un arte escénico basada en la leyenda del general Han, que tiene una historia de varios cientos de años. Los trajes del baile yeowonmu son únicos. Las bailadoras llevan una corona de flores que mide 3 metros de altura y una falda de cinco colores, lo que les hace parecer como si bailara un grupo de fantasmas gigantescos de flores. No le está permitido a nadie acercarse a las coronas de flores.

Pero, después de terminar el ritual de danoje, todo el mundo comparte las flores que son un principal elemento decorativo de las coronas, ya que se cree que llevarlas en brazos y guardarlas en el hogar traerá buena suerte, buena cosecha y sanación. A partir de ello, durante toda la jornada todos los participantes del festival pueden disfrutar de varios eventos deportivos tales como lucha tradicional coreana y juego de columpio.
내용1. 송림동 동제 : 본래 한[장군](/topic/장군)의 [사당](/topic/사당)은 바구나무숲에 있었다. 사당 앞에는 커다란 포구나무가 서 있었고, [금줄](/topic/금줄)이 항상 쳐져 있었다. 사당은 왜경(倭警)들이 기독교도들을 시켜 훼철하여 지금은 돌무더기만 남아 있다. 단오굿은 5월 5일 미명에 행했으며, 3년마다 무당을 불러 성대하게 단오굿을 행하였다. 단오굿은 주민들이 한장군 오누이를 방문한 뒤에 행하였다. 먼저 주민들은 한장군의 누이가 있는 곳으로 알려진, 잡목이 우거진 숲 속에 있는 암석인 ‘장군덤’에 가서 인사드리면서 쇠를 친 다음, 바구나무숲에 있는 한장군 사당으로 가서 단오굿을 하였다. 이 단오굿은 50년 전에 사라졌으며, 지금은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에 이곳에서 ‘동제’를 행하고 있다. 동제는 깨끗한 사람을 가려서 선정한 [제관](/topic/제관)이 행하며, 비용은 동민이 분담한다.

2. 대종동과 진충묘의 동제 : 용성면 일대 대종동의 진충묘(盡忠廟)라는 [현판](/topic/현판)을 붙여둔 ‘한당’은 대종동(大宗洞)에서 들 한가운데에 위치한다. 이곳에서는 한장군이 한종유(韓宗愈)라고 알려져 있다. 이 인물은 고려 말 때 재상을 지낸 한종유와는 출생 연대와 출생지 등이 다른 동명이인(同名異人)이지만 이곳에서는 동일한 인물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주민들은 한종유가 청도군 운문면 대천동 어설[마을](/topic/마을) 출생이며, 자인에서 왜군을 물리칠 때는 17세였다고 한다. 또한 대천동에는 청주 한씨(淸州 韓氏)의 선영(先塋)이 있으나 그는 17세에 죽었기 때문에 그를 제향할 자손도 없고 무덤도 없다. 그 대신에 용성면의 6개동, 즉 대종동(대종마을과 괘일마을)·용천동·용전동·가척동에서 주민들이 집집마다 추렴해 제사를 행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기에 왜경의 압력으로 그 제사는 중단되었다. 당시 구장(區長)의 집안은 망하였다고 한다. 그때 중단되기 전에 행해진 단오굿은 대단히 성대하여 주막이 [서고](/topic/서고) 인근 지역에서 찾아온 구경꾼들이 운집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1947년에 창녕 조씨(昌寧 曺氏)와 청주 한씨가 대부분인 대종동 주민들이 발의하여 6개 동이 함께 참여해 복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다른 마을에서 협력하지 않아 대종동 주민들만 추렴하여 사당을 짓고 매년 단오일 자시(子時)에 제향하게 되었다. 이날은 모든 동민이 [음복](/topic/음복)하면서 하루 종일 춤추고 노래하며 놀았다. 지금의 제사에서는 봉사(장님)가 대내림을 하여 대가 가는 집안의 주인이 제주(祭酒)가 되어 행하고 있다.

3. 한장군의 누이 제당 : 자인면 마라동[縣內]에서는 또 다른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즉 한장군은 오누이였으며, 한장군이 임진왜란에서 의병으로 그의 누이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다가 왜적을 만나 자인 고을을 구했다고 한다. 이것을 기리기 위해 이 지역에서는 한장군의 누이를 사당에 모시고 있다. 자인사당은 원래 계림(桂林)에 위치한 제1한묘(韓廟)와 면사무소 뒤편에 위치한 제2한묘가 있었다. 제2한묘는 한장군 누이동생의 사당이라고도 한다.

원당동의 ‘한당’에는 제향 때 술을 두 잔 올리며, [축문](/topic/축문)에 누이가 배향이라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원래 이 당은 현재의 군내(舊九史縣)에 있었고, 다음에 원동으로 옮겼으며, 그다음에 지금의 자인면으로 옮겼다. 한묘의 제향에서는 영신사(迎神詞)를 부른다. 이것은 축문이 아니며, 음률도 축문과 달리 논매기 노래와 비슷하다. 영신사는 통인(通人)이 사흘 정도 연습해 창(唱)한다.

仁之山兮 古有廟 將軍 靈兮 永訣休
(과거에 불린 부분)
殲敵兵兮 護國兮 怨刀石兮 血痕留
(이하 1968년 여원무 복원 때 불린 부분)
鄕邦民兮 賴安兮 功不朽兮 澤尙流
年復年兮 民俗兮 女圓舞兮 續前遊
想英靈兮 不浪兮 庶陟降兮 感千秋

4. 유제(柳堤)와 참왜석 : 자인면 교촌(校村)의 향교 뒤편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참왜석 근처는 정월대보름날 동제를 행할 때의 제장이다. 단오굿에서는 아침부터 마을 사람들이 모여 천막을 치고 종이를 깔고, 그 위에 제수를 늘어놓고 하루 종일 그대로 두며, 언덕 위에서 놀이하면서 음식을 먹는다. 전설에 얽힌 ‘버들못[柳堤]’은 바로 언덕 밑에 있으며 그 맞은편에 도천산이 지척에 보인다.

5. 계림과 삼정지 : 개장지 숲은 일견 고대의 성림(聖林)을 연상시킬 정도로 고목이 우거져 있다. 그러나 이곳의 고목들은 일제가 군함의 갑판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대부분 벌채하였다고 한다. 그 일대에는 속칭 ‘[말무덤](/topic/말무덤)’이라고 부르는 고분들이 산재한다. 주민들이 한장군묘라고 믿는 고총(古塚)도 그 중 하나이다. 자인[농업](/topic/농업)고등학교에서 운동장 정지작업을 할 때 한 개의 고분이 헐리면서 토기와 인골이 나왔다고 한다. 주민들은 그것이 한장군의 유골이라고 하여 1969년에 ‘개장지 숲’ 진충묘 옆으로 이장하였다. 그 고총을 영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하여 가야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은제 [장신구](/topic/장신구)와 순금 [귀고리](/topic/귀고리) 등을 출토하였다. 이 숲의 어귀에는 성황당이 있으며, 버들[가지](/topic/가지)를 꽂은 금줄을 쳐 두었다. 개장지 숲이 끊어지는 곳에 새못(三政池)이 있으며, 그 가운데 한장군의 ‘말무덤’이라고 부르는 고분의 봉분이 위치한다.

6. 여원무 : 단오굿에서는 현사(縣司)가 있던 자리에서 집결하여 가장행렬로 진장(陳場)터까지 온다. 이곳은 한장군이 진을 친 곳이라 하여 향사 때는 여기에서 말달리기와 활쏘기, [씨름](/topic/씨름) 등을 하였다. 여기에서 옛날에는 여원무를 연행하고, 한당으로 가서 제사를 올리고, 다시 돌아가서 고을원에게 여원무를 보이고 해산했다고 한다. 단오굿에는 고을원이 참여하지 않지만 모든 아전청(衙前廳)의 이속(吏屬)들이 통인 한 명만 남기고 모두 참여했다고 한다.

화랭이(巫夫)의 아들인 13~14세의 미소년 두 명이 여장(女裝)하여 여원무를 시작하기 전에 춤추면서 나아간다. 붉은 [행전](/topic/행전)을 치고, 붉은 [치마](/topic/치마)에 초록 [저고리](/topic/저고리)를 입고서 두 손에 한 자가량의 끈을 쥔 미소년들은 여원화의 옆에서 출발하여 중앙으로 진무(進舞)하여 중앙지점에서 돌아선다. 이때의 매구([꽹과리](/topic/꽹과리)) 가락은 ‘질매구’([길굿](/topic/길굿))이다.
여장동남의 진무가 끝나면 먼저 높이 10척의 여원화를 쓰고 땅에 닿는 오색채의(五色彩衣)를 입은 두 명의 관무부(官巫夫)가 중앙으로 진무하여 ‘덧뵈기’ 가락으로 춤을 춘다. 채의는 [화관](/topic/화관)에 달렸으며,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화관이 거대하기 때문에 길고 느린 가락을 울린다. 여원화의 주위에는 30~40명이 원진(圓陣)을 치고 덧뵈기 가락으로 춤을 춘다. 처음 주위의 원진에서 북과 [나발](/topic/나발)로 구성된 군문 풍악으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원진 밖에 따로 늘어선 무부들의 풍악에 맞추어 전체가 춤을 춘다. 1969년 단오에서부터 전설 속의 왜구 섬멸 장면을 끼워 넣어 극화하였다.

여원화에는 그 신성성 때문에 많은 금기가 따른다. 단오제를 행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꽃 근처에 접근할 수 없지만 단오굿이 끝나는 파장에 이르러서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꽃송이를 가져가기에 혈안이 된다. 이 꽃송이를 몸에 품고 가서 집에 두면 풍년·제액(除厄)·치병(治病) 등의 효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원화는 마지막에 [도리깨](/topic/도리깨)로 타작하여 형체가 완전히 사라진다.

현재 행해지는 [한장군놀이](/topic/한장군놀이)의 전승·보존·발전은 지역 주민들의 노력의 결실이다. 1970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으면서 형태가 다듬어졌으며, 1971년 3월 16일 ‘중요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한장군놀이는 내용이 많이 줄어들고 변용되었으며, 제의도 유교식으로 거행되고 있다. 1974년에 개장지 숲에다 한장군 묘를 만들고, 기념비를 세우고, 진충사를 새로 건립하고 단장하였다. 그 이후에 고 이종대와 고 김도근이 중심이 되어 ‘한장군무형문화재보존위원회’를 조직하여 복원과 전승에 힘을 기울였다. 1985년 단오제에 대한 본격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졌으며 1986년부터는 권명화(대구 무형문화재 제9호)가 중심이 되어 무당의 큰 굿을 부활하였다. 또 1986년 11월에 안명욱이, 2007년 3월에 박인태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topic/유자)로 지정되어서 이를 전승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과 함께 ‘한장군놀이’는 2007년 3월 12일에 ‘경산자인단오제’로 명칭을 변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한장군놀이가 단오행사에 부속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경산자인단오제’는 본래 ‘단오굿’이라 불렸는데 중요무형문화재 명칭을 통일하기 위해서 ‘단오굿’을 ‘단오제’로 변경한 것이다.
참고문헌자인의 여원무와 [한[장군](/topic/장군)놀이](/topic/한장군놀이) (김택규, 경북예악지, 경상북도, 1989)
자인의 맥 (이종대, 우진기획, 1991)
자인단오 (경산문화원, 1998)
자인단오굿‘ 큰 굿’ 복원에 관한 조사노트 (김택규·이기태, 향토사연구 13, 한국향토[사전](/topic/사전)국협의회, 1998)
문화유적분포지도-경산시 (경산시, 대구대학교 중앙박물관, 2006)
내용1. 송림동 동제 : 본래 한[장군](/topic/장군)의 [사당](/topic/사당)은 바구나무숲에 있었다. 사당 앞에는 커다란 포구나무가 서 있었고, [금줄](/topic/금줄)이 항상 쳐져 있었다. 사당은 왜경(倭警)들이 기독교도들을 시켜 훼철하여 지금은 돌무더기만 남아 있다. 단오굿은 5월 5일 미명에 행했으며, 3년마다 무당을 불러 성대하게 단오굿을 행하였다. 단오굿은 주민들이 한장군 오누이를 방문한 뒤에 행하였다. 먼저 주민들은 한장군의 누이가 있는 곳으로 알려진, 잡목이 우거진 숲 속에 있는 암석인 ‘장군덤’에 가서 인사드리면서 쇠를 친 다음, 바구나무숲에 있는 한장군 사당으로 가서 단오굿을 하였다. 이 단오굿은 50년 전에 사라졌으며, 지금은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에 이곳에서 ‘동제’를 행하고 있다. 동제는 깨끗한 사람을 가려서 선정한 [제관](/topic/제관)이 행하며, 비용은 동민이 분담한다.

2. 대종동과 진충묘의 동제 : 용성면 일대 대종동의 진충묘(盡忠廟)라는 [현판](/topic/현판)을 붙여둔 ‘한당’은 대종동(大宗洞)에서 들 한가운데에 위치한다. 이곳에서는 한장군이 한종유(韓宗愈)라고 알려져 있다. 이 인물은 고려 말 때 재상을 지낸 한종유와는 출생 연대와 출생지 등이 다른 동명이인(同名異人)이지만 이곳에서는 동일한 인물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주민들은 한종유가 청도군 운문면 대천동 어설[마을](/topic/마을) 출생이며, 자인에서 왜군을 물리칠 때는 17세였다고 한다. 또한 대천동에는 청주 한씨(淸州 韓氏)의 선영(先塋)이 있으나 그는 17세에 죽었기 때문에 그를 제향할 자손도 없고 무덤도 없다. 그 대신에 용성면의 6개동, 즉 대종동(대종마을과 괘일마을)·용천동·용전동·가척동에서 주민들이 집집마다 추렴해 제사를 행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기에 왜경의 압력으로 그 제사는 중단되었다. 당시 구장(區長)의 집안은 망하였다고 한다. 그때 중단되기 전에 행해진 단오굿은 대단히 성대하여 주막이 [서고](/topic/서고) 인근 지역에서 찾아온 구경꾼들이 운집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1947년에 창녕 조씨(昌寧 曺氏)와 청주 한씨가 대부분인 대종동 주민들이 발의하여 6개 동이 함께 참여해 복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다른 마을에서 협력하지 않아 대종동 주민들만 추렴하여 사당을 짓고 매년 단오일 자시(子時)에 제향하게 되었다. 이날은 모든 동민이 [음복](/topic/음복)하면서 하루 종일 춤추고 노래하며 놀았다. 지금의 제사에서는 봉사(장님)가 대내림을 하여 대가 가는 집안의 주인이 제주(祭酒)가 되어 행하고 있다.

3. 한장군의 누이 제당 : 자인면 마라동[縣內]에서는 또 다른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즉 한장군은 오누이였으며, 한장군이 임진왜란에서 의병으로 그의 누이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다가 왜적을 만나 자인 고을을 구했다고 한다. 이것을 기리기 위해 이 지역에서는 한장군의 누이를 사당에 모시고 있다. 자인사당은 원래 계림(桂林)에 위치한 제1한묘(韓廟)와 면사무소 뒤편에 위치한 제2한묘가 있었다. 제2한묘는 한장군 누이동생의 사당이라고도 한다.

원당동의 ‘한당’에는 제향 때 술을 두 잔 올리며, [축문](/topic/축문)에 누이가 배향이라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원래 이 당은 현재의 군내(舊九史縣)에 있었고, 다음에 원동으로 옮겼으며, 그다음에 지금의 자인면으로 옮겼다. 한묘의 제향에서는 영신사(迎神詞)를 부른다. 이것은 축문이 아니며, 음률도 축문과 달리 논매기 노래와 비슷하다. 영신사는 통인(通人)이 사흘 정도 연습해 창(唱)한다.

仁之山兮 古有廟 將軍 靈兮 永訣休
(과거에 불린 부분)
殲敵兵兮 護國兮 怨刀石兮 血痕留
(이하 1968년 여원무 복원 때 불린 부분)
鄕邦民兮 賴安兮 功不朽兮 澤尙流
年復年兮 民俗兮 女圓舞兮 續前遊
想英靈兮 不浪兮 庶陟降兮 感千秋

4. 유제(柳堤)와 참왜석 : 자인면 교촌(校村)의 향교 뒤편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참왜석 근처는 정월대보름날 동제를 행할 때의 제장이다. 단오굿에서는 아침부터 마을 사람들이 모여 천막을 치고 종이를 깔고, 그 위에 제수를 늘어놓고 하루 종일 그대로 두며, 언덕 위에서 놀이하면서 음식을 먹는다. 전설에 얽힌 ‘버들못[柳堤]’은 바로 언덕 밑에 있으며 그 맞은편에 도천산이 지척에 보인다.

5. 계림과 삼정지 : 개장지 숲은 일견 고대의 성림(聖林)을 연상시킬 정도로 고목이 우거져 있다. 그러나 이곳의 고목들은 일제가 군함의 갑판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대부분 벌채하였다고 한다. 그 일대에는 속칭 ‘[말무덤](/topic/말무덤)’이라고 부르는 고분들이 산재한다. 주민들이 한장군묘라고 믿는 고총(古塚)도 그 중 하나이다. 자인[농업](/topic/농업)고등학교에서 운동장 정지작업을 할 때 한 개의 고분이 헐리면서 토기와 인골이 나왔다고 한다. 주민들은 그것이 한장군의 유골이라고 하여 1969년에 ‘개장지 숲’ 진충묘 옆으로 이장하였다. 그 고총을 영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하여 가야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은제 [장신구](/topic/장신구)와 순금 [귀고리](/topic/귀고리) 등을 출토하였다. 이 숲의 어귀에는 성황당이 있으며, 버들[가지](/topic/가지)를 꽂은 금줄을 쳐 두었다. 개장지 숲이 끊어지는 곳에 새못(三政池)이 있으며, 그 가운데 한장군의 ‘말무덤’이라고 부르는 고분의 봉분이 위치한다.

6. 여원무 : 단오굿에서는 현사(縣司)가 있던 자리에서 집결하여 가장행렬로 진장(陳場)터까지 온다. 이곳은 한장군이 진을 친 곳이라 하여 향사 때는 여기에서 말달리기와 활쏘기, [씨름](/topic/씨름) 등을 하였다. 여기에서 옛날에는 여원무를 연행하고, 한당으로 가서 제사를 올리고, 다시 돌아가서 고을원에게 여원무를 보이고 해산했다고 한다. 단오굿에는 고을원이 참여하지 않지만 모든 아전청(衙前廳)의 이속(吏屬)들이 통인 한 명만 남기고 모두 참여했다고 한다.

화랭이(巫夫)의 아들인 13~14세의 미소년 두 명이 여장(女裝)하여 여원무를 시작하기 전에 춤추면서 나아간다. 붉은 [행전](/topic/행전)을 치고, 붉은 [치마](/topic/치마)에 초록 [저고리](/topic/저고리)를 입고서 두 손에 한 자가량의 끈을 쥔 미소년들은 여원화의 옆에서 출발하여 중앙으로 진무(進舞)하여 중앙지점에서 돌아선다. 이때의 매구([꽹과리](/topic/꽹과리)) 가락은 ‘질매구’([길굿](/topic/길굿))이다.
여장동남의 진무가 끝나면 먼저 높이 10척의 여원화를 쓰고 땅에 닿는 오색채의(五色彩衣)를 입은 두 명의 관무부(官巫夫)가 중앙으로 진무하여 ‘덧뵈기’ 가락으로 춤을 춘다. 채의는 [화관](/topic/화관)에 달렸으며,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화관이 거대하기 때문에 길고 느린 가락을 울린다. 여원화의 주위에는 30~40명이 원진(圓陣)을 치고 덧뵈기 가락으로 춤을 춘다. 처음 주위의 원진에서 북과 [나발](/topic/나발)로 구성된 군문 풍악으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원진 밖에 따로 늘어선 무부들의 풍악에 맞추어 전체가 춤을 춘다. 1969년 단오에서부터 전설 속의 왜구 섬멸 장면을 끼워 넣어 극화하였다.

여원화에는 그 신성성 때문에 많은 금기가 따른다. 단오제를 행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꽃 근처에 접근할 수 없지만 단오굿이 끝나는 파장에 이르러서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꽃송이를 가져가기에 혈안이 된다. 이 꽃송이를 몸에 품고 가서 집에 두면 풍년·제액(除厄)·치병(治病) 등의 효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원화는 마지막에 [도리깨](/topic/도리깨)로 타작하여 형체가 완전히 사라진다.

현재 행해지는 [한장군놀이](/topic/한장군놀이)의 전승·보존·발전은 지역 주민들의 노력의 결실이다. 1970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으면서 형태가 다듬어졌으며, 1971년 3월 16일 ‘중요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한장군놀이는 내용이 많이 줄어들고 변용되었으며, 제의도 유교식으로 거행되고 있다. 1974년에 개장지 숲에다 한장군 묘를 만들고, 기념비를 세우고, 진충사를 새로 건립하고 단장하였다. 그 이후에 고 이종대와 고 김도근이 중심이 되어 ‘한장군무형문화재보존위원회’를 조직하여 복원과 전승에 힘을 기울였다. 1985년 단오제에 대한 본격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졌으며 1986년부터는 권명화(대구 무형문화재 제9호)가 중심이 되어 무당의 큰 굿을 부활하였다. 또 1986년 11월에 안명욱이, 2007년 3월에 박인태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topic/유자)로 지정되어서 이를 전승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과 함께 ‘한장군놀이’는 2007년 3월 12일에 ‘경산자인단오제’로 명칭을 변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한장군놀이가 단오행사에 부속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경산자인단오제’는 본래 ‘단오굿’이라 불렸는데 중요무형문화재 명칭을 통일하기 위해서 ‘단오굿’을 ‘단오제’로 변경한 것이다.
참고문헌자인의 여원무와 [한[장군](/topic/장군)놀이](/topic/한장군놀이) (김택규, 경북예악지, 경상북도, 1989)
자인의 맥 (이종대, 우진기획, 1991)
자인단오 (경산문화원, 1998)
자인단오굿‘ 큰 굿’ 복원에 관한 조사노트 (김택규·이기태, 향토사연구 13, 한국향토[사전](/topic/사전)국협의회, 1998)
문화유적분포지도-경산시 (경산시, 대구대학교 중앙박물관, 2006)
역사경산자인단오제는 신라 제34대 경덕왕(재위 742~765) 때, 경산군(慶山郡)을 장산군(獐山郡)으로 개칭한 이후에 발생했을 것으로 상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산군 건치연혁(慶山郡 建置沿革)」에 “이 지역이 원래 압량소국(押梁小國) 또는 압독국(押督國)이라 불리던 것을 지미왕(祗味王=祗摩王)이 신라에 예속시켜 군(郡)을 두었고, 그 뒤 신라 경덕왕 때 장산으로 개칭하였으며, 고려 초기에는 장산(章山)이라 하였다가 충선왕(忠宣王)때 경산(慶山)으로 개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한[장군](/topic/장군)놀이](/topic/한장군놀이)의 가장행렬 때 앞서는 대표적인 ‘장산사명기(獐山司命旗)’는 적어도 신라 경덕왕 시대의 장산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한장군(韓將軍)의 존재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지역 주민들은 실재 인물이면서 그들의 수호신으로 믿고 있다. 즉 한장군은 지역민 정체성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지역민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한장군’은 신라 또는 고려시대 사람이라고만 전해 오지만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다. 그의 이름이 한종유(韓宗愈)라 전해지기도 하지만 고려 충렬왕 때 좌정승을 지낸 복재(復齋) 한종유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전설이나 신화 성격을 띠고 있어서 실재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단종 대왕이나 [최영 장군](/topic/최영장군)·김유신 장군 등과 같이 신화 전설의 의역사화(擬歷史化)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영남 지방에는 장군이나 장수에 관한 전설이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 또한 한장군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 또 한장군은 ‘대장군→한(大)장군→한(韓)장군’으로의 변천과 결부해 신라시대 대장군인 김유신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는 어쨌든 전설이 아닌 실존인물로 믿어지는 이 고을의 수호신이다.

『자인현읍지(慈仁縣邑誌)』 여원무(女圓舞)조에 “자인현은 풍속이 질박(質朴)하고 신라시대의 유풍이 있다”고 소개하면서 여원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만력시(萬曆時, 편자가 만력시라 한 것은 심히 잘못 기록한 것이고, 신라와 고려 사이에서 지금까지 전해진 것)에 한 장군이 있었는데 그 이름을 잃어 버렸거나 또는 한종유(韓宗愈)라고 한다”고 하였다. 즉 여원무는 조선시대가 아니라 신라와 고려 사이의 시기라고 규정하고, 주인공도 정확하지 않음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지방의 도천산(到天山)에 왜구(倭寇)가 은거하고 있을 때 한장군이 여원무를 춤추었는데 색지를 오려서 꽃을 만들고 이것으로 두 개의 둥근 관(冠)을 꾸미고 오색지를 늘여 놓고 그의 누이와 함께 여자의 복장으로 각각 관을 쓰고 산 밑에있는 ‘버들 못[柳堤]’에서 춤을 추었다. 한편 광대들이 잡희(雜戱)를 해서 왜구들이 산에서 내려와 구경하는 동안에 급습해서 많은 [무리](/topic/무리)를 무찔렀다. 이 버들못의 [제방](/topic/제방)에는 바위가 있는데, 바위에는 칼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어서 전하는 말에 참왜석(斬倭石)이라 하며, 매년 이날이 되면 못 물이 붉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고을 사람들이 그 충의를 흠모해서 신사(神祠)를 세우고 단오일이면 여원무를 실연하였는데 동남(童男) 두 사람이 여장(女裝)을 하고 먼저 춤추었고 또한 광대가 잡희를 하며 북을 치고 징(鉦)을 울렸다. 이 행사를 호장(戶長)이 주관하여 [사모](/topic/사모)관대의 정장을 하고 해마다 제사 지내서 끊이지 않았으며, 만일 제사를 폐지하면 이상한 재변이 반드시 일어나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유속(遺俗)이 전해온다. 장산군사명(獐山郡司命)이라고 표시한 깃발을 높이 받들어 중시하고 있으며, 하동면(下洞面) 6개 동과 송림동(松林洞) 하북면(下北面) 마라동(麻羅洞)에서도 또한 [사당](/topic/사당)을 짓고 제사지냈다”고 하였다.

즉 이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에는 여러 곳에 한장군의 사당이 세워지고 도천산성(到天山城)과 유제(柳堤), 참왜석[또는 검흔석(劍痕石)]의 유적이 생겨났다. 또한 사당에 해마다 제사를 지냄으로써 한장군을 모시는 습속과 유풍이 일어났으며, 여원무가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이와 더불어 성대한 놀이와 토속적인 굿이 벌어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장군이 죽은 후에 자인 주민들은 그의 충의를 추앙하여 여러 곳에 사당을 세우고, [고래](/topic/고래)의 명절인 [수릿날](/topic/수릿날), 즉 단오절에 추모제사를 모신 뒤 여원무와 광대잡희·무당굿·[씨름](/topic/씨름)·[그네](/topic/그네) 등 다채로운 민속으로 사나흘을 즐겼다. 이것이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는 자인단오제의 시작이다. 지역민에게 한장군의 중요성은 해마다 단오일이면 한장군제를 전승ㆍ보존ㆍ발전하는 것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중기에 현감 송수현(宋秀賢)이 한장군의 일을 나라에 알려 벼슬을 추서받게 되었다. 현감은 새로 진충사(盡忠祠)를 지어 한장군을 모시게 되면서 한묘(韓廟)는 두 개가 되었다.

조선 후기에서부터 관 주도로 행해지면서 지역사회의 축제로 자리 잡은 한장군제는 그 사회·문화적 상징성으로 인해 일제강점기에는 탄압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한장군 신앙에 관한 일제의 탄압은 한장군에 대한 지역민의 심성 속에 오래전부터 자리하고 있는 저항의식에 대한 대응책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사회 성원들의 저항의식은 임진왜란 당시 자인 지역의 대유학자이면서 의병장인 성재(省齋) 최문병(崔文炳, 1557~1599)이 1593년 단옷날 참왜석(斬倭石) 앞에서 제사를 올린 뒤에 읊었다는 시(詩) 에서 살필 수 있다. “당년의 그 훌륭한 공이 사방의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니, 빛나는 충성은 삭지를 않아 천년을 지나도 늠름하여라 …… 수릿날 여원무는 영원할지리니(功烈當動四方 精忠不泯凜千霜 至今不廢將軍事 ……端午女圓永有光)”라는 대목은 지역민의 항왜의식(抗倭意識)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다. 또한 한장군에 대한 지역민의 폭넓은 심성은 한당(韓堂)이 자인면ㆍ용성면ㆍ진량면 등 일곱 곳에 이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항왜의식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이르러 묘우(廟宇, 신위를 모신 집)가 강압적으로 훼철당하고, 제의가 중단되었으며, 놀이마저 중단되는 운명을 겪게 하였다.

한장군을 중심으로 한 지역민의 집단 무의식은 광복과 더불어 이 때 행사를 부활시켰다. 1950년대 중반 들어와 한장군놀이에 관심이 많으면서 지화(紙花)를 잘 만든 김용호와 후에 기능보[유자](/topic/유자)가 된 고 김도근 외 한 명이 중심이 되어 자인단오제를 복원하여 한 차례 행한 적이 있지만, 재정의 취약성으로 중단되었다. 1969년부터 본격적으로 복원 연행되다가 1970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때 국무총리상을 받음으로써 그 형태가 다듬어졌다. 일제강점기 때 중단된 것을 1972년에 개장지 숲에 한장군묘를 설단하고, 기념비를 세우고, 진충사를 새로 건립하고 단장하였다. 그 이후 ‘한장군무형문화재보존위원회’를 조직, 이 놀이의 보존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한장군놀이’는 여원무 복장을 한 한장군과 누이동생을 꾸며 앞세워 그 뒤에 ‘사또’ 행차를 따르게 한 가장행렬로 시작해, 말달리기와 씨름 같은 여흥을 즐겼고, 여자는 그네를 뛰었다. 이때 인근 각지에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였고, 가장행렬에 쓰는 [화관](/topic/화관)이 귀신을 쫓는 힘이 있다 하여 다투어 얻어갔다.

여원무는 이러한 전설을 안고 수백 년 내려오는 무형문화재로서 그 춤의 차림이 특이하여 다른 곳에서는 이와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 머리에 쓰는 꽃관의 높이가 3m(10자)이며, 온 몸을 오색[치마](/topic/치마)로 가려서 사람은 안 보이고 거대한 꽃 귀신을 연상케 한다.

동제는 한장군 사당이나 ‘한당(韓堂)’이라고 부르는 [마을](/topic/마을)제당에서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에 행한다. 이러한 민속은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한장군과 관련한 동제를 행하는 송림동과 대종동 등 마을에서는 오월 단오에 ‘자인단오굿’을 통하여 한장군의 넋을 기리면서 전승 기념행사를 치르고 있다. 이 행사는 조선시대부터 행하던 것이 지금까지 전승되는 것이다. 이때 행하는 자인팔광대는 한묘 앞[마당](/topic/마당)에서 행하던 가면무극이다. 이 동제는 역사적 사건이 지역 주민들에게 전승축하 행사로 각인되어 지역축제로 승화된 모습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역사경산자인단오제는 신라 제34대 경덕왕(재위 742~765) 때, 경산군(慶山郡)을 장산군(獐山郡)으로 개칭한 이후에 발생했을 것으로 상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산군 건치연혁(慶山郡 建置沿革)」에 “이 지역이 원래 압량소국(押梁小國) 또는 압독국(押督國)이라 불리던 것을 지미왕(祗味王=祗摩王)이 신라에 예속시켜 군(郡)을 두었고, 그 뒤 신라 경덕왕 때 장산으로 개칭하였으며, 고려 초기에는 장산(章山)이라 하였다가 충선왕(忠宣王)때 경산(慶山)으로 개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한[장군](/topic/장군)놀이](/topic/한장군놀이)의 가장행렬 때 앞서는 대표적인 ‘장산사명기(獐山司命旗)’는 적어도 신라 경덕왕 시대의 장산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한장군(韓將軍)의 존재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지역 주민들은 실재 인물이면서 그들의 수호신으로 믿고 있다. 즉 한장군은 지역민 정체성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지역민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한장군’은 신라 또는 고려시대 사람이라고만 전해 오지만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다. 그의 이름이 한종유(韓宗愈)라 전해지기도 하지만 고려 충렬왕 때 좌정승을 지낸 복재(復齋) 한종유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전설이나 신화 성격을 띠고 있어서 실재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단종 대왕이나 [최영 장군](/topic/최영장군)·김유신 장군 등과 같이 신화 전설의 의역사화(擬歷史化)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영남 지방에는 장군이나 장수에 관한 전설이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 또한 한장군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 또 한장군은 ‘대장군→한(大)장군→한(韓)장군’으로의 변천과 결부해 신라시대 대장군인 김유신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는 어쨌든 전설이 아닌 실존인물로 믿어지는 이 고을의 수호신이다.

『자인현읍지(慈仁縣邑誌)』 여원무(女圓舞)조에 “자인현은 풍속이 질박(質朴)하고 신라시대의 유풍이 있다”고 소개하면서 여원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만력시(萬曆時, 편자가 만력시라 한 것은 심히 잘못 기록한 것이고, 신라와 고려 사이에서 지금까지 전해진 것)에 한 장군이 있었는데 그 이름을 잃어 버렸거나 또는 한종유(韓宗愈)라고 한다”고 하였다. 즉 여원무는 조선시대가 아니라 신라와 고려 사이의 시기라고 규정하고, 주인공도 정확하지 않음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지방의 도천산(到天山)에 왜구(倭寇)가 은거하고 있을 때 한장군이 여원무를 춤추었는데 색지를 오려서 꽃을 만들고 이것으로 두 개의 둥근 관(冠)을 꾸미고 오색지를 늘여 놓고 그의 누이와 함께 여자의 복장으로 각각 관을 쓰고 산 밑에있는 ‘버들 못[柳堤]’에서 춤을 추었다. 한편 광대들이 잡희(雜戱)를 해서 왜구들이 산에서 내려와 구경하는 동안에 급습해서 많은 [무리](/topic/무리)를 무찔렀다. 이 버들못의 [제방](/topic/제방)에는 바위가 있는데, 바위에는 칼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어서 전하는 말에 참왜석(斬倭石)이라 하며, 매년 이날이 되면 못 물이 붉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고을 사람들이 그 충의를 흠모해서 신사(神祠)를 세우고 단오일이면 여원무를 실연하였는데 동남(童男) 두 사람이 여장(女裝)을 하고 먼저 춤추었고 또한 광대가 잡희를 하며 북을 치고 징(鉦)을 울렸다. 이 행사를 호장(戶長)이 주관하여 [사모](/topic/사모)관대의 정장을 하고 해마다 제사 지내서 끊이지 않았으며, 만일 제사를 폐지하면 이상한 재변이 반드시 일어나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유속(遺俗)이 전해온다. 장산군사명(獐山郡司命)이라고 표시한 깃발을 높이 받들어 중시하고 있으며, 하동면(下洞面) 6개 동과 송림동(松林洞) 하북면(下北面) 마라동(麻羅洞)에서도 또한 [사당](/topic/사당)을 짓고 제사지냈다”고 하였다.

즉 이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에는 여러 곳에 한장군의 사당이 세워지고 도천산성(到天山城)과 유제(柳堤), 참왜석[또는 검흔석(劍痕石)]의 유적이 생겨났다. 또한 사당에 해마다 제사를 지냄으로써 한장군을 모시는 습속과 유풍이 일어났으며, 여원무가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이와 더불어 성대한 놀이와 토속적인 굿이 벌어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장군이 죽은 후에 자인 주민들은 그의 충의를 추앙하여 여러 곳에 사당을 세우고, [고래](/topic/고래)의 명절인 [수릿날](/topic/수릿날), 즉 단오절에 추모제사를 모신 뒤 여원무와 광대잡희·무당굿·[씨름](/topic/씨름)·[그네](/topic/그네) 등 다채로운 민속으로 사나흘을 즐겼다. 이것이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는 자인단오제의 시작이다. 지역민에게 한장군의 중요성은 해마다 단오일이면 한장군제를 전승ㆍ보존ㆍ발전하는 것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중기에 현감 송수현(宋秀賢)이 한장군의 일을 나라에 알려 벼슬을 추서받게 되었다. 현감은 새로 진충사(盡忠祠)를 지어 한장군을 모시게 되면서 한묘(韓廟)는 두 개가 되었다.

조선 후기에서부터 관 주도로 행해지면서 지역사회의 축제로 자리 잡은 한장군제는 그 사회·문화적 상징성으로 인해 일제강점기에는 탄압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한장군 신앙에 관한 일제의 탄압은 한장군에 대한 지역민의 심성 속에 오래전부터 자리하고 있는 저항의식에 대한 대응책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사회 성원들의 저항의식은 임진왜란 당시 자인 지역의 대유학자이면서 의병장인 성재(省齋) 최문병(崔文炳, 1557~1599)이 1593년 단옷날 참왜석(斬倭石) 앞에서 제사를 올린 뒤에 읊었다는 시(詩) 에서 살필 수 있다. “당년의 그 훌륭한 공이 사방의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니, 빛나는 충성은 삭지를 않아 천년을 지나도 늠름하여라 …… 수릿날 여원무는 영원할지리니(功烈當動四方 精忠不泯凜千霜 至今不廢將軍事 ……端午女圓永有光)”라는 대목은 지역민의 항왜의식(抗倭意識)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다. 또한 한장군에 대한 지역민의 폭넓은 심성은 한당(韓堂)이 자인면ㆍ용성면ㆍ진량면 등 일곱 곳에 이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항왜의식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이르러 묘우(廟宇, 신위를 모신 집)가 강압적으로 훼철당하고, 제의가 중단되었으며, 놀이마저 중단되는 운명을 겪게 하였다.

한장군을 중심으로 한 지역민의 집단 무의식은 광복과 더불어 이 때 행사를 부활시켰다. 1950년대 중반 들어와 한장군놀이에 관심이 많으면서 지화(紙花)를 잘 만든 김용호와 후에 기능보[유자](/topic/유자)가 된 고 김도근 외 한 명이 중심이 되어 자인단오제를 복원하여 한 차례 행한 적이 있지만, 재정의 취약성으로 중단되었다. 1969년부터 본격적으로 복원 연행되다가 1970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때 국무총리상을 받음으로써 그 형태가 다듬어졌다. 일제강점기 때 중단된 것을 1972년에 개장지 숲에 한장군묘를 설단하고, 기념비를 세우고, 진충사를 새로 건립하고 단장하였다. 그 이후 ‘한장군무형문화재보존위원회’를 조직, 이 놀이의 보존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한장군놀이’는 여원무 복장을 한 한장군과 누이동생을 꾸며 앞세워 그 뒤에 ‘사또’ 행차를 따르게 한 가장행렬로 시작해, 말달리기와 씨름 같은 여흥을 즐겼고, 여자는 그네를 뛰었다. 이때 인근 각지에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였고, 가장행렬에 쓰는 [화관](/topic/화관)이 귀신을 쫓는 힘이 있다 하여 다투어 얻어갔다.

여원무는 이러한 전설을 안고 수백 년 내려오는 무형문화재로서 그 춤의 차림이 특이하여 다른 곳에서는 이와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 머리에 쓰는 꽃관의 높이가 3m(10자)이며, 온 몸을 오색[치마](/topic/치마)로 가려서 사람은 안 보이고 거대한 꽃 귀신을 연상케 한다.

동제는 한장군 사당이나 ‘한당(韓堂)’이라고 부르는 [마을](/topic/마을)제당에서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에 행한다. 이러한 민속은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한장군과 관련한 동제를 행하는 송림동과 대종동 등 마을에서는 오월 단오에 ‘자인단오굿’을 통하여 한장군의 넋을 기리면서 전승 기념행사를 치르고 있다. 이 행사는 조선시대부터 행하던 것이 지금까지 전승되는 것이다. 이때 행하는 자인팔광대는 한묘 앞[마당](/topic/마당)에서 행하던 가면무극이다. 이 동제는 역사적 사건이 지역 주민들에게 전승축하 행사로 각인되어 지역축제로 승화된 모습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在庆尚北道庆山市慈仁面和龙城面一带[端午](/topic/端午)时举行的庆典活动兼洞祭。

根据对“慈仁端午祭”的记载,新罗或者高丽时代遇倭寇入侵,韩将军跳女圆舞吸引倭寇的视线,趁此,军士们突袭并击退了倭寇。韩将军过逝后,慈仁当地居民为表达他们对韩将军的景仰之情,建了许多[祠堂](/topic/祠堂),在端午时节举行悼念祭祀活动,在其后三,四天期间举行女圆舞,广大(音)(民间艺人—译注)杂耍,巫俗祭仪,摔跤,[荡秋千](/topic/荡秋千)等多种民俗活动,这就是传承至今的慈仁端午祭的开端。

“韩将军祭”自朝鲜后期开始,由官方主导举行,并发展为民间庆典。由于其社会,文化象征性,在日本占领时期,还成为镇压对象。1971 年以“[韩将军游戏](/topic/韩将军游戏)”为名称,被指定为重要的非物质文化遗产﹐ 2007 年更名为“庆山慈仁端午祭”。

与韩将军有关的洞祭,正月十五在韩将军祠堂或村庄祭堂“韩堂”举行。此外,在松林洞和大宗洞等村庄,为缅怀韩将军,端午时举行“慈仁端午[巫祭](/topic/巫祭)”纪念战胜活动。

活动内容是,首先在韩将军墓举行祭祀,然后有化妆队伍行进。过去还有骑马,射箭,摔跤等活动。化妆队伍行进结束后,还有女圆舞,八广大戏,端午巫祭等活动。

女圆舞是伴随韩将军传说传承了数百年的非物质文化遗产,舞者服饰很特别,在其他地方很难见到,头上的花冠高达三米,全身被五彩裙遮住,会让人联想到巨大的花神。女圆舞中的花冠具有神圣性,因此有很多[禁忌](/topic/禁忌)。

举行端午祭之前,谁都不能接近花冠,但端午祭结束后,男女老少纷纷上去抢花,因为他们相信这花放在家里可以带来丰收,以及消灾,祛病。除此之外,周边还附带进行摔跤,荡秋千等多种娱乐活动。
Gyeongsan Jain Danoje is a village ritual and festival held on Dano, the fifth day of the fifth lunar month, in the villages of Jain and Yongseong in Gyeongsan of North Gyeongsang Province.

According to records, upon Japanese invasion during Silla or Goryeo, a general named Han defeated the invaders by distracting them with a performance of yeowonmu (women’s circle dance), during which soldiers defeated them. Shrines were built around the village upon the general’s death to honor his loyalty and following a memorial rite held in his honor on Dano Day, the villagers commemorated for three to four days with elaborate festivities, including the circle dance, shamanic rituals, clown performances, wrestling and swing riding. This was the origin of today’s Gyeongsan Jain Danoje.

In late Joseon, the celebrations took shape as a government-organized local festivity with the name Hanjanggunje ([General Han Festival](/topic/GeneralHanFestival)) and its socio-cultural significance made it a target of colonial oppression during Japanese occupation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In 1971, the festival was designated by the government as an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and in 2007 its official name was changed to Gyeongsan Jain Danoje.

The village tutelary ritual (dongje) for General Han is held on Jeongwoldaeboreum (Great Full Moon) in the first lunar month, at a village shrine called Hanjanggunsadang (General Han Shrine) or Handang. In villages Songnim and Daejong, the festival Jain Danogut is held on Dano Day as a commemoration of victory and of the spirit of General Han. Festivities include a memorial rite at General Han’s tomb, followed by a costume parade, then women’s circle dance, eight-character play (palgwangdaenori) and the shamanic Dano ritual. In the past, horseback riding, archery and wrestling events were also held.

The circle dance yeowonmu is a centuries-old performing art based on the General Han legend and designated as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The costumes for the dance are unique, including a 3-meter-tall flower crown worn with a five-color skirt, which makes the performer appear to be an enormous flower ghost. Due to its sanctity, there are many taboos associated with the flower crown. No one is permitted to approach the crown prior to the festival, but once the Dano ritual is over, everyone clamors to get a hold of the flowers, for it is believed that carrying them in one’s arms and keeping them at home will bring a good harvest, good fortune and healing.
Festival que se celebra en el día de [[Dano](/topic/festividaddelquintodíadelquintomeslunar)](/topic/Dano), el 5 del quinto mes del calendario lunar en las aldeas de Jain-myeon y Yongseung-myeon de la ciudad de Gyeongsan de la provincia de Gyeongsangbuk-do.

Según los registros, cuando el reino Silla o Goryeo sufría la invasión japonesa, un general llamado Han derrotó a los invasores japoneses. El general intentó distraerlos bailando la danza llamada yeowonmu mientras sus soldados derrotaban a los enemigos. Tras la muerte del general Han, los habitantes de la aldea de Jain construyeron unos santuarios para rendir homenaje a él por su lealtad y realizan un ritual para honrar al general Han en el día de Dano, en el que los aldeanos conmemoran al general Han por tres días disfrutando de diversos eventos como [danza en círculo](/topic/danzaencírculo), rituales chamánicos, actuaciones de payasos, lucha tradicional coreana y juego de columpio. Este fue el origen del festival de Gyeongsan Jain Danoje que se celebra el día de hoy.

A finales de la dinastía Joseon, el gobierno de la dinastía empezaba a organizar la celebración del festival como una fiesta local con el nombre de Hanjanggunje, que significa “festival del general Han”, cuyo significado sociocultural se convirtió en un objeto de la opresión colonial japonesa durante la primera mitad del siglo XX. En 1971, el gobierno coreano designó el festival como patrimonio cultural intangible. En 2007 cambiaron el nombre del festival por Gyeongsan Jain Danoje cuyo nombre original era Hanganggunnori.

El ritual dongje relacionado con el general Han se efectua en el 15 del primer mes del calendario lunar en los santuarios del pueblo llamado Hanjanggunsadang o Handang. En las aldeas de Songnim-dong y Daejongdong se realiza el jaindanogut como una ceremonia conmemorativa del triunfo y el espíritu del general Han.

Las festividades incluyen un rito conmemorativo efectuado en la tumba del general Han y un desfile de disfraces. En el pasado, también se celebraban la equitación y el tiro con arco. Después de la procesión, continúan con la danza en círculo efectuada solo por mujeres, yeowonmu, la actuación de ocho carácteres, palgwangdaenori y el ritual chamánico realizado en el día de Dano, danogut.

La danza en círculo fue designada como patrimonio cultural intangible de Corea por ser un arte escénico basada en la leyenda del general Han, que tiene una historia de varios cientos de años. Los trajes del baile yeowonmu son únicos. Las bailadoras llevan una corona de flores que mide 3 metros de altura y una falda de cinco colores, lo que les hace parecer como si bailara un grupo de fantasmas gigantescos de flores. No le está permitido a nadie acercarse a las coronas de flores.

Pero, después de terminar el ritual de danoje, todo el mundo comparte las flores que son un principal elemento decorativo de las coronas, ya que se cree que llevarlas en brazos y guardarlas en el hogar traerá buena suerte, buena cosecha y sanación. A partir de ello, durante toda la jornada todos los participantes del festival pueden disfrutar de varios eventos deportivos tales como lucha tradicional coreana y juego de colump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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