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룡제

한국무속신앙사전
용을 그려 놓고 기우하는 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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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을 그려 놓고 기우하는 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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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성
정의용을 그려 놓고 기우하는 의례.
정의용을 그려 놓고 기우하는 의례.
내용화룡기우의 유래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 「신라본기(新羅本紀)」4 진평왕 50년조에서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비를 빌었다”라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 이어 1086년(고려 선종 3)에 가뭄이 오래 지속되자 [민가](/topic/민가)에서의 화룡기우가 제안되어 수용되었고, 3년 뒤에도 화룡기우가 설행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양진(楊津)과 저자도(楮子島)에서 화룡기우가 거행되었으며 당시 송나라에서 반포된 화룡기우법이 참고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송대의 화룡기우 법식은 『문헌통고(文獻通考)』권77 교사고(郊祀考)10 우(雩)에 실려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물과 관련된 용, 물고기, 거북 등이 그려진 그림이 걸려 있는 제단에 수조(水鳥)인 거위의 피를 바치고 수목(水木)인 버들[가지](/topic/가지)로 용에 물을 뿌리는 [유감주술](/topic/유감주술)을 거행하되 비를 얻은 뒤에는 화룡을 수중에 넣는 것으로 의식을 마[무리](/topic/무리)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용산강과 저자도에서 화룡제를 거행하는 것이 점차 국행기우제로 공식화되었으며, 비로소 18세기 초에 확립된 국행기우제 12제차에 저자도와 용산강의 화룡기우가 제2차와 제7차에 걸쳐 두 번씩 반복되었다. 정조대에 완성된 『춘관통고(春官通考)』 권42 「길례(吉禮)」 우(雩) 기우(祈雨)의 내용을 고려할 때, 조선 후기에 거행된 화룡기우제의 경우 용산강에는 백룡, 저자도에는 청룡이 각각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에 화룡제가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무엇보다 용의 그림을 거꾸로 걸어 놓는 관례였다. 특히 의례경건주의적 입장에 있던 영조는 이러한 관행이 용을 굴복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을 공경하는 뜻에 어긋난다고 비판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용산강과 저자도의 화룡기우제에 설치된 거꾸로 된 용의 이미지[畫龍倒掛]가 승천의 방향[升龍]으로 바뀌게 됨으로써 논의는 일단락되었다. 화룡기우와 관련된 두 번째 논란은 의례를 마치고 나서 화룡을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일반적으로 화룡제를 마치면 거위와 제물을 화룡과 함께 싸서 침수시키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이것이 신을 업신여기는 신성 모독으로 여겨져 망료의 방식으로 화룡을 처리케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화룡제 종료 후 화룡을 [봉안](/topic/봉안)하는 것으로 법식이 정해[지게](/topic/지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논란을 거쳐 날아오르는 화룡의 이미지가 채택되고, 수중으로 투기되던 화룡이 태워지거나 다시 봉안됨으로써 용을 굴복하는 강요의례적 화룡제의 모습은 약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화룡제는 지방의 기우제에서 여전히 성행되었다.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경남 울산 지역에서는 시장 터에 토룡을 만들고 화룡을 걸어 놓고는 사나흘 동안 무당이 비를 빌고, 용에 물을 뿌리기도 하였다. 아울러 1930년대 경주 지역에서도 무당이 토룡과 화룡에게 [무악](/topic/무악)을 연주하며 기우제를 거행하였다고 한다.

화룡제는 회화적 양식을 통해 용을 현존시키고 거기에 기원과 주술적 행위를 가하는 유서 깊은 의례였다. 이것은 20세기를 넘나들면서도 여전히 설행될 정도로 국가나 지방 및 민간에서도 널리 애용된 기우제 방식이었다.
참고문헌[석전·기우·[안택](/topic/안택)](/topic/석전·기우·안택) (조선총독부, 1938)
中國シャマニズムの硏究 (中村治兵衛, 刀水書房, 1992)
용부림과 용부림꾼-용과 기우제 (최종성, 민속학연구6, 국립민속박물관, 1999)
祈雨祭謄錄, [기우[제등](/topic/제등)록](/topic/기우제등록)과 [기후](/topic/기후)의례 (최종성,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내용화룡기우의 유래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 「신라본기(新羅本紀)」4 진평왕 50년조에서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비를 빌었다”라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 이어 1086년(고려 선종 3)에 가뭄이 오래 지속되자 [민가](/topic/민가)에서의 화룡기우가 제안되어 수용되었고, 3년 뒤에도 화룡기우가 설행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양진(楊津)과 저자도(楮子島)에서 화룡기우가 거행되었으며 당시 송나라에서 반포된 화룡기우법이 참고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송대의 화룡기우 법식은 『문헌통고(文獻通考)』권77 교사고(郊祀考)10 우(雩)에 실려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물과 관련된 용, 물고기, 거북 등이 그려진 그림이 걸려 있는 제단에 수조(水鳥)인 거위의 피를 바치고 수목(水木)인 버들[가지](/topic/가지)로 용에 물을 뿌리는 [유감주술](/topic/유감주술)을 거행하되 비를 얻은 뒤에는 화룡을 수중에 넣는 것으로 의식을 마[무리](/topic/무리)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용산강과 저자도에서 화룡제를 거행하는 것이 점차 국행기우제로 공식화되었으며, 비로소 18세기 초에 확립된 국행기우제 12제차에 저자도와 용산강의 화룡기우가 제2차와 제7차에 걸쳐 두 번씩 반복되었다. 정조대에 완성된 『춘관통고(春官通考)』 권42 「길례(吉禮)」 우(雩) 기우(祈雨)의 내용을 고려할 때, 조선 후기에 거행된 화룡기우제의 경우 용산강에는 백룡, 저자도에는 청룡이 각각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에 화룡제가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무엇보다 용의 그림을 거꾸로 걸어 놓는 관례였다. 특히 의례경건주의적 입장에 있던 영조는 이러한 관행이 용을 굴복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을 공경하는 뜻에 어긋난다고 비판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용산강과 저자도의 화룡기우제에 설치된 거꾸로 된 용의 이미지[畫龍倒掛]가 승천의 방향[升龍]으로 바뀌게 됨으로써 논의는 일단락되었다. 화룡기우와 관련된 두 번째 논란은 의례를 마치고 나서 화룡을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일반적으로 화룡제를 마치면 거위와 제물을 화룡과 함께 싸서 침수시키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이것이 신을 업신여기는 신성 모독으로 여겨져 망료의 방식으로 화룡을 처리케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화룡제 종료 후 화룡을 [봉안](/topic/봉안)하는 것으로 법식이 정해[지게](/topic/지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논란을 거쳐 날아오르는 화룡의 이미지가 채택되고, 수중으로 투기되던 화룡이 태워지거나 다시 봉안됨으로써 용을 굴복하는 강요의례적 화룡제의 모습은 약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화룡제는 지방의 기우제에서 여전히 성행되었다.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경남 울산 지역에서는 시장 터에 토룡을 만들고 화룡을 걸어 놓고는 사나흘 동안 무당이 비를 빌고, 용에 물을 뿌리기도 하였다. 아울러 1930년대 경주 지역에서도 무당이 토룡과 화룡에게 [무악](/topic/무악)을 연주하며 기우제를 거행하였다고 한다.

화룡제는 회화적 양식을 통해 용을 현존시키고 거기에 기원과 주술적 행위를 가하는 유서 깊은 의례였다. 이것은 20세기를 넘나들면서도 여전히 설행될 정도로 국가나 지방 및 민간에서도 널리 애용된 기우제 방식이었다.
참고문헌[석전·기우·[안택](/topic/안택)](/topic/석전·기우·안택) (조선총독부, 1938)
中國シャマニズムの硏究 (中村治兵衛, 刀水書房, 1992)
용부림과 용부림꾼-용과 기우제 (최종성, 민속학연구6, 국립민속박물관, 1999)
祈雨祭謄錄, [기우[제등](/topic/제등)록](/topic/기우제등록)과 [기후](/topic/기후)의례 (최종성,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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