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무격

한국무속신앙사전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1891~1968)이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무속조사를 전담하면서 조사한 것을 정리하여 1932년에 발간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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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1891~1968)이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무속조사를 전담하면서 조사한 것을 정리하여 1932년에 발간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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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준
정의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1891~1968)이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무속조사를 전담하면서 조사한 것을 정리하여 1932년에 발간한 책.
내용무라야마 지준은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사회학 전공)에 1916년 입학하여 1919년 7월 졸업한 후 조선총독부의 촉탁이 되었다. 1941년 조선총독부 촉탁직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조선장학회의 주사로 활동하였고 1945년 그의 양부 무라야마 지젠(村山智全)이 세상을 뜨자 묘광사(妙光寺)의 주지가 되었다.

그의 저술로 『조선의 복장』과 『조선의 시장』이 있으나, 조선의 민간신앙에 관심이 특히 많아 『[조선의 귀신](/topic/조선의귀신)』(1929년)을 시작으로 『조선의 [풍수](/topic/풍수)』(1931년), 「조선의 무격」(1932년), 『조선의 점복과 예언』(1933년) 등 민간신앙에 관한 이른바 4부작을 남겨 유명하다(모두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것으로 일본어로 되어 있다).

그는 문헌조사와 현지조사를 하고 각 지방경찰에 의한 조사 결과 자료를 수집 분석하였다. 이능화의 「[조선무속고](/topic/조선무속고)」(1927년), 『[용재총화](/topic/용재총화)』, 『필원잡기』 등을 참고하였고, 경성신문 등 신문자료를 섭렵하고 1930년 6월을 전후로 1927년 10월에는 강원도·경상도, 1930년 11월에는 남부지방을 현지 조사하였다. 그리고 경성제국대학 교수 아키바 다카시(秋葉隆)와 아카마쓰 지조(赤松智城), 조선총독부 촉탁 오청(吳晴) 등의 글을 참조하기도 하였다. 조선 전체 경찰서 가운데 12곳을 제외한 모든 경찰서에 의뢰하여 1930년 6월 전국적인 무격조사를 한 것도 그에 의해서였다.

「조선의 무격」은 총 8장(619쪽)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으로 본문 외에 옥추경(玉樞經), 성조경(成造經), [안택](/topic/안택)경(安宅經), 제왕경(帝王經) 등 31개의 경문으로 구성된 기도경문집(祈禱經文集)과 무구(巫具), 본향당(本鄕堂), [대감놀이](/topic/대감놀이), 도당제(都堂祭), 국[사당](/topic/사당), 무고(巫鼓), 무령(巫鈴), 무선(巫扇), 신장간(神將竿), [명다리](/topic/명다리) 등에 관한 총 211장의 흑백사진을 실은 조선의 무격 부도(附圖)로 구성되어 있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제1장 무격의 분포
제1절 무격의 수 제2절 신분, 성, 연령, 제3절 분포상황
제2장 무격의 호칭
제1절 무칭(巫稱)의 종류 제2절 무칭의 분포 제3절 기록상의 무칭
제4절 무칭 무당에 대해
제3장 성무(成巫)의 동기와 과정
제1절 성무의 동기 제2절 영감(靈感)성무의 과정 제3절 세습성무의 과정
제4절 [생업](/topic/생업)(生業)성무의 과정 제5절 기타 성무 과정 제6절 성무의 기관
제4장 무행신사(巫行神事)제1절 신사의 종류 제2절 [고래](/topic/고래)(古來)의 신사 제3절 현행(現行)의 신사
제5장 무도(巫禱) 의식
제1절 무의(巫儀)의 관념 제2절 무의의 차례 제3절 각지 현행의 무의
제6장 무격의 수요
제1절 무의 수요(需要)와 신뢰 제2절 현재의 신무(信巫) 상황제3절 [단골](/topic/단골)제
제7장 무격의 영향
제1절 무격의 효과 제2절 무격의 폐해 제3절 전선(全鮮)의 폐해
제8장 무구와 [무경](/topic/무경)
제1절 무구 제2절 무경


무라야마는 일반 대중들이 지지하는 사상이야말로 사회적인 원동력이라고 보고 조선의 민간신앙을 연구하였다. 그가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활동하던 1920년대와 1930년대는 일제의 조선통치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 시기였다. 즉 내지연장주의에 의하여 동화(同化)정책이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를 위하여 구관(舊慣)제도에 대한 조사사업도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즉 조선 사람들을 정신적, 사상적으로 어떻게 하면 동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무라야마는 그것을 조선의 민간신앙에서 찾았다. 따라서 무라야마는 개화된 사람들과 기독교인들이 무속 등 민간신앙을 미신으로 보고 타파하려는 움직임에 대하여 ‘타파 불가능론’과 무속대책 신중론을 제기하였다. 그와 같은 신중론은 무라야마 지준에 의하여 처음 주장된 것은 아니다. 1927년에 최남선, 이능화가 조선의 토대신앙으로서 무속을 주목한 이래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에 무라야마 지준이, 1937년에 아카마쓰 지조가 신중론과 개선론을 제기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들은 일제의 신사(神社)정책 속에서 양자의 유사(類似) 또는 동원(同源)을 주장하여 양자의 결합을 모색한 결과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참고문헌村山智順師の謎 (朝倉敏夫, 民博通信 79, 日本國立民族學博物館, 1997)
일제하 무속론과 식민지권력 (최석영, 서경문화사, 1999)
조선의 무격 (최석영, 해제, 근대한국 민속 인류학 자료대계 3권, 민속원, 2008)
영상이 말하는 식민지 조선 (최길성, 민속원, 2009)
한국무속학회서울굿의 다양성과 구조김헌선2006
한국민속학회서울굿 ‘대안주거리’ 의 문화사적 의의 연구김헌선·김형근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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