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평암마을도제

한국무속신앙사전
[마을](/topic/마을)의 재앙을 막고 복을 기원하기 위해 거리의 잡신을 대접하는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평암리 평암마을 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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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topic/마을)의 재앙을 막고 복을 기원하기 위해 거리의 잡신을 대접하는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평암리 평암마을 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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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금
정의[마을](/topic/마을)의 재앙을 막고 복을 기원하기 위해 거리의 잡신을 대접하는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평암리 평암마을 제의.
정의[마을](/topic/마을)의 재앙을 막고 복을 기원하기 위해 거리의 잡신을 대접하는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평암리 평암마을 제의.
내용평암[마을](/topic/마을)의 도제는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오후 4시쯤에 마을회관 앞[마당](/topic/마당)에서 지낸다. 최근에는 도제가 간소화되었지만 마을이 번창한 당시까지만 해도 이 마을 도제는 매우 성대했다고 한다. 과거에 행해진 평암마을의 도제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도제를 모실 때 일주일 전에 마을회의를 열어 제사를 모실 유사와 제물을 담당할 사람을 선정하였다. 유사는 마을 사람들 가운데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에 맞고 깨끗한 사람만이 선정되었다. 유사로 선정된 사람은 집에 [금줄](/topic/금줄)을 치고 [대문](/topic/대문) 바깥에 [황토](/topic/황토)를 뿌렸다. 유사는 사흘 동안 궂은 곳에는 [가지](/topic/가지) 않았고, 소변만 보더라도 즉시 손을 씻고 목욕재계를 했다. 제물은 깨끗하고 유고가 없는 집안의 사람을 선정하여 장만하게 했다.

마을 공동제상에는 돼지머리, [사과](/topic/사과), [대추](/topic/대추), 밤, 곶감, 배, 자반, 건포, 간장, 식혜, 김치, 육고기탕, 듬북탕, 어물탕, 편, 떡, 적, 육물, 면, 메 두 그릇, 국 두 그릇, 잔 두 잔 등이 올라갔다. 도제를 모실 때에는 마을 공동제상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각자 개인상을 차려 마을회관 앞마당으로 가져왔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상(喪)을 당한 집, 개고기를 먹은 집, 소가 새끼를 낳은 집, 선영 제사를 지낸 집 등은 개인상을 차려올 수 없었다. 자식을 못 낳아 공들일 사람은 자신의 집에서 음식을 마련하여 마을회관으로 가져와 큰 상을 차려 놓기도 했다. 그러나 공들이기 원하는 사람은 부정이 없는 깨끗한 사람만 허락되었으며, 제의 전날 목욕재계를 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제사 장소에 와야 했다. 도제를 모실 때 참여한 마을 사람들은 50여 명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제상](/topic/제상) 앞에 돈을 올려놓고 절을 하며 각자의 소원을 빌었다. 제상에 쌓인 돈은 이듬해에 지낼 도제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풍물패는 도제를 지내기 전에 하천에서 손발을 씻고 목욕재계를 해야 했다. 오후 4시가 되면 풍물패가 마을 어귀에서 ‘들당산굿’부터 치기 시작했다. 풍물패는 잡신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4시부터 보름달이 솟을 때까지 계속해서 풍물을 쳤다.

보름달이 떠오르면 본격적으로 제사가 시작되었다. 무당과 유사가 마을회관 앞 공터에 마련된 제상 앞에서 제의를 시작하였다. 집사들이 제상을 차리면 유사가 먼저 유교식으로 의례를 행하였다. 유사가 술을 올리고 나서 재배를 하고 집사가 [축문](/topic/축문)을 읽었다. 유교식 의례가 끝나면 이 마을에 사는 무당이 무속식으로 제사를 지냈다. 무당은 [단골](/topic/단골)네가 아니라 신을 받은 점쟁이였다. 무당은 마을의 안녕과 재수를 기원하는 [비손](/topic/비손)을 하며 소지를 올렸다. 제사가 거의 마[무리](/topic/무리)되어 가면 유사가 거래밥을 만들어 마을 어귀 삼거리에 묻었다. 돼지머리의 위턱은 거래밥과 함께 [한지](/topic/한지)로 싸서 북쪽에 묻었고, 돼지머리 아래턱은 거래밥과 함께 한지로 싸서 남쪽에 묻었다. 마을 사람들은 묻은 거래밥을 꺼내 먹으면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다. 도제를 마치면 마을 사람들은 음식을 모두 챙겨 유사 집으로 가져갔다. 부녀자들은 유사 집에서 덕은밥(따뜻하게 데운 밥)을 만들어 동네 사람들과 나누어 먹으면서 늦게까지 어울려 놀았다.

도제를 모신 이튿날에는 풍물패가 마을 어귀로 다시 가서 잡신을 돌려보내기 위해 ‘날당산굿’을 했다. 풍물패는 풍물을 치면서 “어제 저녁 잘 모셨은께 오늘은 잘 가쇼”라고 [사설](/topic/사설)을 했다. 날당산굿을 마친 이튿날에는 풍물패가 다시 모여 집집마다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마당밟이](/topic/마당밟이)를 했다.

1995년까지만 해도 평암마을의 도제는 풍물패, 무당, 유사가 함께 주관하여 많은 주민의 참여 속에 성대하게 연행되었다. 지금은 65가구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많은 사람이 이 마을에 살았고, 풍물패의 기량도 대단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도제를 모실 마땅한 사람이 없어 마을 이장의 주관으로 간단하게 지내고 있다. 도제 때 비손을 해 주던 이 마을 무당도 사망하고, 풍물을 치던 사람들도 연로하거나 사망하여 풍물의 맥은 단절된 상태이다. 이 마을 도제는 최근까지도 중단하지 않고 지내오고는 있지만 인구 감소와 노령화 현상으로 전승 현장이 점점 열악해지고 있다. 마을 부녀자 몇 명이 제사 당일 장을 봐다가 마을회관에서 공동제물을 장만하고 있으며, 마을 사람들도 이젠 개인상을 따로 차려서 오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이 마을에서는 2005년에 제의 날짜를 정월 초하룻날로 변경하기도 했다. 평암마을의 주민이 대부분 노인들로 구성되어 있어 도제 때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따로 음식을 마련하여 상을 차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어서 제의 날짜를 변경하면 설날을 맞아 외지에서 고향을 찾아온 자식과 며느리들이 개인상을 차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명절 때에도 고향을 찾지 않는 사람이 많아졌고, 찾아왔다 해도 젊은 사람들이 마을 제사에는 통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날짜를 변경해도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질 않자 마을 사람들은 제의 날짜를 도로 정월대보름날로 변경하여 제를 지내고 있다.

마을회관에서 제물을 준비하고 회관 앞마당에서 도제를 지낸다. 제물을 마련할 때에는 다소 젊고 깨끗한 사람들만 참여하고 부정한 노인은 마을회관 근처에 오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도제를 지낼 때에는 노인을 비롯한 마을 사람 대부분이 참가한다. 과거처럼 유사는 따로 선정하지 않고 지켜야 할 금기도 없다. 마을 제사는 마을 이장인 김영남과 주민인 백동인이 고정적으로 담당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연로하여 도제 지내기를 꺼리기 때문에 대부분 마을 이장이 전담하여 도제를 진행한다. 그러나 과거처럼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제사를 준비하지는 않지만 마을 사람 대부분은 도제가 앞으로도 지속되길 희망하고 있다. 도제가 중단되면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여길 정도로 평암마을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도제를 중요한 의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제사가 시작되면 부녀회원들이 마을회관 앞마당에 공동제상을 차린다. 제상에는 돼지머리, [삼실과](/topic/삼실과), 밥, 국, [삼색나물](/topic/삼색나물), 생선 등이 올라간다. 제물은 일반 가정집에서 차리는 것과 거의 흡사하다. 과거에는 마을회관 앞마당에 50여 개의 제상이 즐비하게 놓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개인상이 없고 마을 공동제상만 차려질 뿐이다. 제사가 시작되면 제주(祭主)인 마을 이장이 술을 올리고 재배를 한다. 이어 백동인이 축문을 읽으면서 마을의 안녕과 재수를 기원한다. 제사 방식은 [초헌](/topic/초헌)․[아헌](/topic/아헌)․[종헌](/topic/종헌)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도제를 지낼 때는 30명가량의 마을 사람들이 참가한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소원을 빌고 싶은 사람은 제상에 돈을 올려놓고 절을 올리며 소원을 빈다. 과거에는 제상에 올라간 돈이 이듬해의 도제 비용으로 사용되었지만 주민이 많이 줄어든 최근에는 가정마다 1만 원 내지 2만 원을 걷어 제사 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제사가 끝나면 마을 이장이 돼지머리 위턱과 아래턱을 따로 떼어내 거래밥을 만들어 마을 어귀의 삼거리 쪽에 묻는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돼지머리의 위턱은 거래밥과 함께 한지로 싸서 북쪽에 묻고, 돼지머리 아래턱은 거래밥과 함께 한지로 싸서 남쪽에 묻는다. 오후 6시쯤에 도제를 모두 마친 마을 사람들은 제상에 차려진 음식을 거둬 마을회관으로 가져와 나누어먹는다. 마을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도제를 중요시하고 있으나 제사 방식이 많이 간소화되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문헌해남군의 문화유적 (해남군, 1986)
내용평암[마을](/topic/마을)의 도제는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 오후 4시쯤에 마을회관 앞[마당](/topic/마당)에서 지낸다. 최근에는 도제가 간소화되었지만 마을이 번창한 당시까지만 해도 이 마을 도제는 매우 성대했다고 한다. 과거에 행해진 평암마을의 도제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도제를 모실 때 일주일 전에 마을회의를 열어 제사를 모실 유사와 제물을 담당할 사람을 선정하였다. 유사는 마을 사람들 가운데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에 맞고 깨끗한 사람만이 선정되었다. 유사로 선정된 사람은 집에 [금줄](/topic/금줄)을 치고 [대문](/topic/대문) 바깥에 [황토](/topic/황토)를 뿌렸다. 유사는 사흘 동안 궂은 곳에는 [가지](/topic/가지) 않았고, 소변만 보더라도 즉시 손을 씻고 목욕재계를 했다. 제물은 깨끗하고 유고가 없는 집안의 사람을 선정하여 장만하게 했다.

마을 공동제상에는 돼지머리, [사과](/topic/사과), [대추](/topic/대추), 밤, 곶감, 배, 자반, 건포, 간장, 식혜, 김치, 육고기탕, 듬북탕, 어물탕, 편, 떡, 적, 육물, 면, 메 두 그릇, 국 두 그릇, 잔 두 잔 등이 올라갔다. 도제를 모실 때에는 마을 공동제상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각자 개인상을 차려 마을회관 앞마당으로 가져왔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상(喪)을 당한 집, 개고기를 먹은 집, 소가 새끼를 낳은 집, 선영 제사를 지낸 집 등은 개인상을 차려올 수 없었다. 자식을 못 낳아 공들일 사람은 자신의 집에서 음식을 마련하여 마을회관으로 가져와 큰 상을 차려 놓기도 했다. 그러나 공들이기 원하는 사람은 부정이 없는 깨끗한 사람만 허락되었으며, 제의 전날 목욕재계를 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제사 장소에 와야 했다. 도제를 모실 때 참여한 마을 사람들은 50여 명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제상](/topic/제상) 앞에 돈을 올려놓고 절을 하며 각자의 소원을 빌었다. 제상에 쌓인 돈은 이듬해에 지낼 도제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풍물패는 도제를 지내기 전에 하천에서 손발을 씻고 목욕재계를 해야 했다. 오후 4시가 되면 풍물패가 마을 어귀에서 ‘들당산굿’부터 치기 시작했다. 풍물패는 잡신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4시부터 보름달이 솟을 때까지 계속해서 풍물을 쳤다.

보름달이 떠오르면 본격적으로 제사가 시작되었다. 무당과 유사가 마을회관 앞 공터에 마련된 제상 앞에서 제의를 시작하였다. 집사들이 제상을 차리면 유사가 먼저 유교식으로 의례를 행하였다. 유사가 술을 올리고 나서 재배를 하고 집사가 [축문](/topic/축문)을 읽었다. 유교식 의례가 끝나면 이 마을에 사는 무당이 무속식으로 제사를 지냈다. 무당은 [단골](/topic/단골)네가 아니라 신을 받은 점쟁이였다. 무당은 마을의 안녕과 재수를 기원하는 [비손](/topic/비손)을 하며 소지를 올렸다. 제사가 거의 마[무리](/topic/무리)되어 가면 유사가 거래밥을 만들어 마을 어귀 삼거리에 묻었다. 돼지머리의 위턱은 거래밥과 함께 [한지](/topic/한지)로 싸서 북쪽에 묻었고, 돼지머리 아래턱은 거래밥과 함께 한지로 싸서 남쪽에 묻었다. 마을 사람들은 묻은 거래밥을 꺼내 먹으면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다. 도제를 마치면 마을 사람들은 음식을 모두 챙겨 유사 집으로 가져갔다. 부녀자들은 유사 집에서 덕은밥(따뜻하게 데운 밥)을 만들어 동네 사람들과 나누어 먹으면서 늦게까지 어울려 놀았다.

도제를 모신 이튿날에는 풍물패가 마을 어귀로 다시 가서 잡신을 돌려보내기 위해 ‘날당산굿’을 했다. 풍물패는 풍물을 치면서 “어제 저녁 잘 모셨은께 오늘은 잘 가쇼”라고 [사설](/topic/사설)을 했다. 날당산굿을 마친 이튿날에는 풍물패가 다시 모여 집집마다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마당밟이](/topic/마당밟이)를 했다.

1995년까지만 해도 평암마을의 도제는 풍물패, 무당, 유사가 함께 주관하여 많은 주민의 참여 속에 성대하게 연행되었다. 지금은 65가구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많은 사람이 이 마을에 살았고, 풍물패의 기량도 대단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도제를 모실 마땅한 사람이 없어 마을 이장의 주관으로 간단하게 지내고 있다. 도제 때 비손을 해 주던 이 마을 무당도 사망하고, 풍물을 치던 사람들도 연로하거나 사망하여 풍물의 맥은 단절된 상태이다. 이 마을 도제는 최근까지도 중단하지 않고 지내오고는 있지만 인구 감소와 노령화 현상으로 전승 현장이 점점 열악해지고 있다. 마을 부녀자 몇 명이 제사 당일 장을 봐다가 마을회관에서 공동제물을 장만하고 있으며, 마을 사람들도 이젠 개인상을 따로 차려서 오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이 마을에서는 2005년에 제의 날짜를 정월 초하룻날로 변경하기도 했다. 평암마을의 주민이 대부분 노인들로 구성되어 있어 도제 때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따로 음식을 마련하여 상을 차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어서 제의 날짜를 변경하면 설날을 맞아 외지에서 고향을 찾아온 자식과 며느리들이 개인상을 차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명절 때에도 고향을 찾지 않는 사람이 많아졌고, 찾아왔다 해도 젊은 사람들이 마을 제사에는 통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날짜를 변경해도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질 않자 마을 사람들은 제의 날짜를 도로 정월대보름날로 변경하여 제를 지내고 있다.

마을회관에서 제물을 준비하고 회관 앞마당에서 도제를 지낸다. 제물을 마련할 때에는 다소 젊고 깨끗한 사람들만 참여하고 부정한 노인은 마을회관 근처에 오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도제를 지낼 때에는 노인을 비롯한 마을 사람 대부분이 참가한다. 과거처럼 유사는 따로 선정하지 않고 지켜야 할 금기도 없다. 마을 제사는 마을 이장인 김영남과 주민인 백동인이 고정적으로 담당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연로하여 도제 지내기를 꺼리기 때문에 대부분 마을 이장이 전담하여 도제를 진행한다. 그러나 과거처럼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제사를 준비하지는 않지만 마을 사람 대부분은 도제가 앞으로도 지속되길 희망하고 있다. 도제가 중단되면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여길 정도로 평암마을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도제를 중요한 의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제사가 시작되면 부녀회원들이 마을회관 앞마당에 공동제상을 차린다. 제상에는 돼지머리, [삼실과](/topic/삼실과), 밥, 국, [삼색나물](/topic/삼색나물), 생선 등이 올라간다. 제물은 일반 가정집에서 차리는 것과 거의 흡사하다. 과거에는 마을회관 앞마당에 50여 개의 제상이 즐비하게 놓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개인상이 없고 마을 공동제상만 차려질 뿐이다. 제사가 시작되면 제주(祭主)인 마을 이장이 술을 올리고 재배를 한다. 이어 백동인이 축문을 읽으면서 마을의 안녕과 재수를 기원한다. 제사 방식은 [초헌](/topic/초헌)․[아헌](/topic/아헌)․[종헌](/topic/종헌)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도제를 지낼 때는 30명가량의 마을 사람들이 참가한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소원을 빌고 싶은 사람은 제상에 돈을 올려놓고 절을 올리며 소원을 빈다. 과거에는 제상에 올라간 돈이 이듬해의 도제 비용으로 사용되었지만 주민이 많이 줄어든 최근에는 가정마다 1만 원 내지 2만 원을 걷어 제사 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제사가 끝나면 마을 이장이 돼지머리 위턱과 아래턱을 따로 떼어내 거래밥을 만들어 마을 어귀의 삼거리 쪽에 묻는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돼지머리의 위턱은 거래밥과 함께 한지로 싸서 북쪽에 묻고, 돼지머리 아래턱은 거래밥과 함께 한지로 싸서 남쪽에 묻는다. 오후 6시쯤에 도제를 모두 마친 마을 사람들은 제상에 차려진 음식을 거둬 마을회관으로 가져와 나누어먹는다. 마을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도제를 중요시하고 있으나 제사 방식이 많이 간소화되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문헌해남군의 문화유적 (해남군, 1986)
유래전남 해남군 북평면 평암리 금부[마을](/topic/마을)은 현재 평암마을이란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본래 이 마을은 ‘금부마을’로 불렸으나 금부마을이 일제강점기 때 사용한 명칭이라 하여 마을 사람들이 ‘평암마을’로 개칭(改稱)하였다. 이 마을의 도제는 마을이 형성될 때부터 모셔 왔다고 한다. 이 마을의 입향성씨인 김해 김씨(金海 金氏)가 자손의 번창을 위해 도제를 지냈으며 이때 생긴 제의가 현재까지 이 마을에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도제는 거리의 잡신을 대접하는 제사이다. 일명 ‘[거리제](/topic/거리제)’ 또는 ‘[헌식](/topic/헌식)제’라고도 불린다. 도제는 거리에 나가 굶어 죽은 귀신, 물에 빠져 죽은 귀신, 교통사고로 죽은 귀신 등의 잡신을 위하고 그 한을 풀어 주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귀신들은 제삿밥을 얻어먹지 못하고 거리를 떠도는 [무주고혼](/topic/무주고혼)(無主孤魂)이다. 억울하게 죽은 이 귀신들은 가슴에 한이 많아 마을에 큰 재앙을 끼칠 수 있다고 인식되고 있다. 이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잡신들을 잘 대접하여 위로하면 마을의 재앙을 막을 수 있고 복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마을 공동제의로서 잡신을 대접하는 의식은 주로 전남지방의 해안․도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평암마을에서도 잡신을 위로하는 의식인 도제가 오랜 전통을 지니면서 전승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도제를 잘못 지내면 마을에 궂은일이 많이 생긴다고 여긴다. 여름에 가뭄이 심하게 든 적이 있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은 그 원인이 도제를 잘못 지낸 데 있다고 보고 다시 제삿날을 택하여 한여름에 도제를 지냈다고 한다. 평암마을의 주민이 많이 줄고 노령화되는 바람에 요즘 도제는 마을 이장의 주관 아래 매우 간단하게 모셔지고 있다. 1995년까지만 해도 이 마을의 무당, [제관](/topic/제관), 풍물패가 연합하여 도제를 크게 지냈다. 그러나 무당도 1997년에 사망하고 풍물을 치던 사람도 노령화되거나 사망하여 과거처럼 제사 지내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최근에는 마을 이장 부부가 제사를 도맡아 준비하고 있다. 제물은 이장 부인과 두세 명의 부녀회원이 마을회관에서 간단하게 준비하는 정도이다. 이처럼 도제 전승 현장이 많이 약화된 편이지만, 평암마을 주민들은 도제를 지내지 않으면 마을에 궂은일이 생긴다 하여 도제의 전통이 계속 이어지길 희망하고 있다.
유래전남 해남군 북평면 평암리 금부[마을](/topic/마을)은 현재 평암마을이란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본래 이 마을은 ‘금부마을’로 불렸으나 금부마을이 일제강점기 때 사용한 명칭이라 하여 마을 사람들이 ‘평암마을’로 개칭(改稱)하였다. 이 마을의 도제는 마을이 형성될 때부터 모셔 왔다고 한다. 이 마을의 입향성씨인 김해 김씨(金海 金氏)가 자손의 번창을 위해 도제를 지냈으며 이때 생긴 제의가 현재까지 이 마을에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도제는 거리의 잡신을 대접하는 제사이다. 일명 ‘[거리제](/topic/거리제)’ 또는 ‘[헌식](/topic/헌식)제’라고도 불린다. 도제는 거리에 나가 굶어 죽은 귀신, 물에 빠져 죽은 귀신, 교통사고로 죽은 귀신 등의 잡신을 위하고 그 한을 풀어 주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귀신들은 제삿밥을 얻어먹지 못하고 거리를 떠도는 [무주고혼](/topic/무주고혼)(無主孤魂)이다. 억울하게 죽은 이 귀신들은 가슴에 한이 많아 마을에 큰 재앙을 끼칠 수 있다고 인식되고 있다. 이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잡신들을 잘 대접하여 위로하면 마을의 재앙을 막을 수 있고 복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마을 공동제의로서 잡신을 대접하는 의식은 주로 전남지방의 해안․도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평암마을에서도 잡신을 위로하는 의식인 도제가 오랜 전통을 지니면서 전승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도제를 잘못 지내면 마을에 궂은일이 많이 생긴다고 여긴다. 여름에 가뭄이 심하게 든 적이 있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은 그 원인이 도제를 잘못 지낸 데 있다고 보고 다시 제삿날을 택하여 한여름에 도제를 지냈다고 한다. 평암마을의 주민이 많이 줄고 노령화되는 바람에 요즘 도제는 마을 이장의 주관 아래 매우 간단하게 모셔지고 있다. 1995년까지만 해도 이 마을의 무당, [제관](/topic/제관), 풍물패가 연합하여 도제를 크게 지냈다. 그러나 무당도 1997년에 사망하고 풍물을 치던 사람도 노령화되거나 사망하여 과거처럼 제사 지내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최근에는 마을 이장 부부가 제사를 도맡아 준비하고 있다. 제물은 이장 부인과 두세 명의 부녀회원이 마을회관에서 간단하게 준비하는 정도이다. 이처럼 도제 전승 현장이 많이 약화된 편이지만, 평암마을 주민들은 도제를 지내지 않으면 마을에 궂은일이 생긴다 하여 도제의 전통이 계속 이어지길 희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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