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대진동도신제·재고사

한국무속신앙사전
강원도 동해시 대진동에서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행하는 서낭제의 일종. 이 제의는 일반적으로 ‘서낭제’라고 부르지만 [마을](/topic/마을)에서는 특별히 ‘도신’이라고도 이르며, 신에게기도한다는 뜻이다. 도신은 오늘날에도 사용하지만 과거에는 도신이 제의를 주관하였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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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동해시 대진동에서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행하는 서낭제의 일종. 이 제의는 일반적으로 ‘서낭제’라고 부르지만 [마을](/topic/마을)에서는 특별히 ‘도신’이라고도 이르며, 신에게기도한다는 뜻이다. 도신은 오늘날에도 사용하지만 과거에는 도신이 제의를 주관하였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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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길
정의강원도 동해시 대진동에서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행하는 서낭제의 일종. 이 제의는 일반적으로 ‘서낭제’라고 부르지만 [마을](/topic/마을)에서는 특별히 ‘도신’이라고도 이르며, 신에게기도한다는 뜻이다. 도신은 오늘날에도 사용하지만 과거에는 도신이 제의를 주관하였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정의강원도 동해시 대진동에서 매년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행하는 서낭제의 일종. 이 제의는 일반적으로 ‘서낭제’라고 부르지만 [마을](/topic/마을)에서는 특별히 ‘도신’이라고도 이르며, 신에게기도한다는 뜻이다. 도신은 오늘날에도 사용하지만 과거에는 도신이 제의를 주관하였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내용1. 제의 일시 : 연 1회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0시이다. 그리고 3월 초정에 재고사를 올린다.

2. 당집과 당목 : 제당으로는 [서낭당](/topic/서낭당)과 해성당이 있다. 서낭당은 250여 년 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기와](/topic/기와)로 [지붕](/topic/지붕)을 했는데 나무가 썩으면서 자꾸 주저앉는 바람에 수리가 필요하였지만 서낭당은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기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2004년 당시 3,000만 원 정도의 비용을 들여서 개축하였다. 당집의 크기는 가로 약 512㎝, 세로 약 335㎝, 높이 약 255㎝이다. 제당 근처에 있는 해송을 비롯한 여러 나무는 서낭나무라 하여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다. 제당은 정월 12~13일에 깨끗한 사람들이 가서 청소를 한다.
해성당은 해성황당을 이 지역에서 일컫는 말이다. 해성당은 선창가 바위더미에 100여 년 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당집은 없고, 원래 자연석을 이용하여 제단으로 삼고 블록으로 담만 만들어 놓은 상태이다. 또한 30여 년 전에 그 앞으로 도로가 나는 바람에 이곳이 제당인지 쉽게 알아보기 힘들다.

3. 신위 : 제향하는 신격은 4위이다. 서낭당에는 성황지신·토지지신·거리지신 등 3위, 해성당에는 바다용왕을 각각 제향한다

4. [축문](/topic/축문) : 축문은 있지만 한자를 병기하지 않고 한자의 음만 한글로 적어 놓아 무슨 뜻인지는 알기 어렵다. 한글로 옮겨 쓴 축문은 20여 년 전 [마을](/topic/마을) 주민 홍진용이 필사했다. 이 축문은 서낭당 제사에 사용하고 해성당 제사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5. [제관](/topic/제관) : 제관은 [헌관](/topic/헌관) 세 명, 축관과 도가 각 한 명이다. 도가는 음식을 장만하고 서낭제를 주관하는 사람이며, 부정이 없고 생기가 맞는 주민 가운데에서 선택된다. 문헌에 따르면 부모상 등 상주, 출산 및 임신, 질병 등에 관계되는 사람은 물론 집에서 기르는 짐승이 새끼를 낳아도 부정한 것으로 하고 있다. 서낭제를 지내는 곳에는 여자들이 일절 올 수 없다. 서낭제를 준비할 때는 소를 잡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돕는다. 격년으로 행하는 굿을 할 때에도 일이 많기 때문에 제관을 다섯 명 선정한다.

6. 제물 : 제물은 서낭당에 3상, 해성당에 1상 등 4상을 차린다. 매년 치르는 희생물은 소다. 한동안 소를 잡지 않고 시장에서 쇠고기를 사다가 썼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바다에 나간 사람이 생명을 잃는 등 부정이 발생하여 다시 소를 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제사 지내기 대엿새 전에 인근 마을인 망상동으로 가서 희생물로 적당한 황소(수컷)를 결정해 놓고 돌아온다. 그러면 소 주인은 제삿날 오후 3~4시쯤에 맞추어 마을까지 실어다 준다. 2004~2005년까지는 마을에서 직접 소를 잡았지만 이 일을 담당하던 사람이 사망한 뒤로는 도살장의 기술자를 초빙하여 처리하고 있다. 소를 잡기 전에 소를 몰고 와서 서낭당에 도가가 술 한 잔 놓고 “작포합니다” 하고 세 번 소리를 크게 지른다. 조상에게 신고를 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소를 잡는다. 소를 죽여 껍질을 벗기고 먼저 각을 뜨기 시작한다. 피와 내장으로는 탕을 만들어 제당에 올리고, 갈비는 추려서 신위당 세 대를 올리고, 사족(四足)도 올린다. 등뼈는 격년으로 굿할 때에만 추려서 서낭당에 올린다. 탕을 제외하고는 모두 날것이다. 쇠머리는 사용하지 않는다. 어물은 대구, 가자미, 우럭 등을 주둥이와 꼬리와 비늘을 치고 통째로 살짝 구워서 올린다.이렇게 장만한 어물은 한 개의 좌판에 층층이 올려놓고 그 위를 문어로 덮어두는데, 모두 네 개의 좌판을 만든다. 백설기는 시루당 석 되 서 홉으로 총 네 시루를 장만하고,메도 역시 네 그릇을 준비한다. 서낭제에 사용하는 제물 중 백설기와 메는 도가의 부인이 돕고 그 외의 제물은 모두 도가가 직접 장만한다. 과일은 [삼실과](/topic/삼실과)(곶감, [대추](/topic/대추), 밤)만사용하여 보기 좋게 접시에 담아두며, 모두 네 접시를 장만한다. 채소는 무채, 포는 대구포이며 역시 각각 네개를 장만한다. 두부전이나 과자 등은 올리지 않는다. 술은 청주를 사용한다. 소를 제외한 다른 제물은 도가가 제관 한 명을 대동하여 시장을 보아 장만한 것이다.

7. 제의 절차 : [금줄](/topic/금줄)은 제일 사흘 전에 친다. 금줄은 물에 적신 짚으로 왼새끼를 꼬고 사이사이에 [한지](/topic/한지)를 잘라 넣어 만들며, 도가가 직접 만들기도 하지만 짚만 제관에게 나누어 주어 직접 꼬라고 한 적도 있다. 서낭당과 해성당에 먼저 금줄을 치며 도가·제관들 집에도 친다. 이때 금줄과 함께 [황토](/topic/황토)도 깔아둔다. 제물은 유사가 제사 전날 시장에나가서 사 온다. 날이 어두워지면 양초를 밝힌다. 0시가 되면 서낭제의를 시작하며, 보통 40여 분 진행된다. 이후 해성당으로 옮겨 가서 제의를 행하는데, 모두 끝나면 새벽 1시가 넘는다.
제관들은 제당에 들어가기 전에 짚불로 부정을 친다. 이것은 제당 주위를 짚불로 밝혀 돌아다닌 다음 제관들이 짚불을 타 넘어 제당으로 들어가는 행위이다. 제당에 제물을 진설한 다음 도가가 [헌작](/topic/헌작) 후 삼배를 한다. 뒤를 이어 다른 제관들은 합동으로 삼배를 한다. 이후 축관이 고축하고 모든 제관이 합동으로 삼배를 한다. 이후 도가가 동네를 대표하여 조상소지, [서낭신](/topic/서낭신)소지, 거리신소지, 토지신소지 순으로 올린 다음 도가소지, 제관소지, 동네기관장소지(통장, 어촌계장)를 올린다. 이후 제관 세 명이 7개 반을 나누어 각기 마을 어른들의 소지를 올린다. 소지가 끝나면 퇴잔한다. 퇴잔은 제사 후 제사상의 음식을 조금씩 뜯어내 손 없는 방향에 묻어 두는 것을 말하며, 잡귀들이 먹고 가라는 뜻이다. 이후에 [음복](/topic/음복)을 하고는 도가와 제관 한 명이 곧장 해성당으로 이동하여 해성지신을 모신다. 이들이 올 동안 나머지 제관들은 서낭당을 지킨다. 해성당의 제물은 서낭제과 동일하게 별도로 장만하여 제의를 행한다. 해성당 제사는고축 없이 진행된다. 도가가 삼배를 먼저 하고 도가와 제관이 함께 삼배한다. 이후 도가가 해성지신소지를 올리는데, 다른 소지는 없다. 이후 [제상](/topic/제상)의 음식을 조금씩 덜어내어땅에 묻는 퇴잔을 하고 마친다.
한편, 해성당 제의를 마친 도가와 제관이 서낭당으로 돌아오면 모든 제관들이 제물을 분배하고 마을로 돌아간다. 제사에 사용한 제물은 제관들이 모두 가져가는 것이 마을의전통이다. 그러나 쇠고기는 반별로 분배한다.
이렇게 행하는 서낭제는 외부에 일절 공개하지 않으나 해성제는 공개하고 있다.

8. [영험담](/topic/영험담) : ① 서낭당은 [명당](/topic/명당)이라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하나 둘 제당 주변에 묘를 썼다. 그런데 묘를 쓴 집안에서 우환이 생기기 시작했다. 묘를 잘못 썼다 하고 이장(移葬)을 하였다. ② 제당 주변에 향나무가 있으며, 50여 년 전에 이 향나무를 베어간 이가 탈이 나 죽을 뻔했다. ③ 25년 전에 김씨가 죽은 개를 보고는 마을제사에서 소 잡는 것을 도와 준 적이 있다. 그때 제사에 사용하기도 전에 쇠고기를 먹었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④ 20여 년 전에도 소를 잡을 때 돕고 나서 쇠고기를 몰래 가져와 먹다가 죽었다.그래서 이제는 제관, 제집사를 제외한 이들의 출입을 엄금한다.

9. 기타 : 제사에 사용하는 비용은 마을기금으로 충당한다. 동해시쓰레[기장](/topic/기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어촌계에서 공동어장이 있어 전복양식 등을 하여 마련했다. 바다가 황폐화될 무렵에 동해시쓰레기매립장이 대진동에 들어서게 되면서 이 매립장과 관련해서 발생하는 동해시 수입금의 일부를 보상금으로 받는 것을 마을 기금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매년 쓰레기봉투를 무상으로 제공받고, 쓰레기봉투를 판매해서 나오는 수익금의 10%를 보상금으로 받는데, 약 1억 원이다. 그런데 보상금은 5월에 집행되고 서낭제는 정월에 지내야 하기 때문에 정월에 일부 집행할 수 있도록 시에 협조를 요청하여 가불을 받아 서낭제를 치른다. 비용은 보통 1,000만 원(굿을 안 할 경우)에서 3,000만 원(굿을 할 경우)정도 소요된다. 이 밖에 도가와 제관에게 주는 수고비도 있다. 굿을 할 경우에는 도가 60만 원, 제관 10만 원을 받는다. 굿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도가 30만 원, 제관 5만 원이다. 이런 비용들을 정리해 놓은 장부는 통장이 보관하고 있다. 보통 제사를 마치고 날이 밝으면 ‘하기를 닦는다’고 하여 마을총회를 연다.

10. 재고사 : 대진동은 도신제(서낭제와 해성제)가 끝나면 삼월에 재고사를 지낸다. 재고사는 부정이 발생하든 하지 않든 무조건 지내며, 삼월 중의 한 날을 별도로 받아 지냈다. 장소는 서낭당과 해성당??제와 동일하게 성황지신, 토지지신, 거리지신, 해성지신 등 4위이다. 도가 및 제관은 정월에 행했던 제관들과 동일하다. 소를 잡는 대신 쇠고기를 100근 정도 구입하여 사용하지만 나머지 제물은 정월 제물과 동일하다. 제의의 절차는 도신제와 동일하다. 재고사를 지내는 이유는 대보름 제사 후 아무 탈 없이 신들이 잘 돌봐 주어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잘 돌봐 달라는 뜻에서 올리는 것이라고 한다.
참고문헌동해시 역사와 문화유적 (관동대학교박물관, 1996)
동해시의 어로문화 (장정룡·양언석, 동해시, 2000)
동해안 어촌 당신화연구 (이승철, 민속원, 2004)
동해시 대진동 대진[마을](/topic/마을) 도신제 (이승철, 한국의 마을신앙상, 국립민속박물관, 2007)
동해시서낭제 (이한길, 민속원, 2010)
내용1. 제의 일시 : 연 1회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0시이다. 그리고 3월 초정에 재고사를 올린다.

2. 당집과 당목 : 제당으로는 [서낭당](/topic/서낭당)과 해성당이 있다. 서낭당은 250여 년 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기와](/topic/기와)로 [지붕](/topic/지붕)을 했는데 나무가 썩으면서 자꾸 주저앉는 바람에 수리가 필요하였지만 서낭당은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기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2004년 당시 3,000만 원 정도의 비용을 들여서 개축하였다. 당집의 크기는 가로 약 512㎝, 세로 약 335㎝, 높이 약 255㎝이다. 제당 근처에 있는 해송을 비롯한 여러 나무는 서낭나무라 하여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다. 제당은 정월 12~13일에 깨끗한 사람들이 가서 청소를 한다.
해성당은 해성황당을 이 지역에서 일컫는 말이다. 해성당은 선창가 바위더미에 100여 년 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당집은 없고, 원래 자연석을 이용하여 제단으로 삼고 블록으로 담만 만들어 놓은 상태이다. 또한 30여 년 전에 그 앞으로 도로가 나는 바람에 이곳이 제당인지 쉽게 알아보기 힘들다.

3. 신위 : 제향하는 신격은 4위이다. 서낭당에는 성황지신·토지지신·거리지신 등 3위, 해성당에는 바다용왕을 각각 제향한다

4. [축문](/topic/축문) : 축문은 있지만 한자를 병기하지 않고 한자의 음만 한글로 적어 놓아 무슨 뜻인지는 알기 어렵다. 한글로 옮겨 쓴 축문은 20여 년 전 [마을](/topic/마을) 주민 홍진용이 필사했다. 이 축문은 서낭당 제사에 사용하고 해성당 제사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5. [제관](/topic/제관) : 제관은 [헌관](/topic/헌관) 세 명, 축관과 도가 각 한 명이다. 도가는 음식을 장만하고 서낭제를 주관하는 사람이며, 부정이 없고 생기가 맞는 주민 가운데에서 선택된다. 문헌에 따르면 부모상 등 상주, 출산 및 임신, 질병 등에 관계되는 사람은 물론 집에서 기르는 짐승이 새끼를 낳아도 부정한 것으로 하고 있다. 서낭제를 지내는 곳에는 여자들이 일절 올 수 없다. 서낭제를 준비할 때는 소를 잡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돕는다. 격년으로 행하는 굿을 할 때에도 일이 많기 때문에 제관을 다섯 명 선정한다.

6. 제물 : 제물은 서낭당에 3상, 해성당에 1상 등 4상을 차린다. 매년 치르는 희생물은 소다. 한동안 소를 잡지 않고 시장에서 쇠고기를 사다가 썼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바다에 나간 사람이 생명을 잃는 등 부정이 발생하여 다시 소를 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제사 지내기 대엿새 전에 인근 마을인 망상동으로 가서 희생물로 적당한 황소(수컷)를 결정해 놓고 돌아온다. 그러면 소 주인은 제삿날 오후 3~4시쯤에 맞추어 마을까지 실어다 준다. 2004~2005년까지는 마을에서 직접 소를 잡았지만 이 일을 담당하던 사람이 사망한 뒤로는 도살장의 기술자를 초빙하여 처리하고 있다. 소를 잡기 전에 소를 몰고 와서 서낭당에 도가가 술 한 잔 놓고 “작포합니다” 하고 세 번 소리를 크게 지른다. 조상에게 신고를 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소를 잡는다. 소를 죽여 껍질을 벗기고 먼저 각을 뜨기 시작한다. 피와 내장으로는 탕을 만들어 제당에 올리고, 갈비는 추려서 신위당 세 대를 올리고, 사족(四足)도 올린다. 등뼈는 격년으로 굿할 때에만 추려서 서낭당에 올린다. 탕을 제외하고는 모두 날것이다. 쇠머리는 사용하지 않는다. 어물은 대구, 가자미, 우럭 등을 주둥이와 꼬리와 비늘을 치고 통째로 살짝 구워서 올린다.이렇게 장만한 어물은 한 개의 좌판에 층층이 올려놓고 그 위를 문어로 덮어두는데, 모두 네 개의 좌판을 만든다. 백설기는 시루당 석 되 서 홉으로 총 네 시루를 장만하고,메도 역시 네 그릇을 준비한다. 서낭제에 사용하는 제물 중 백설기와 메는 도가의 부인이 돕고 그 외의 제물은 모두 도가가 직접 장만한다. 과일은 [삼실과](/topic/삼실과)(곶감, [대추](/topic/대추), 밤)만사용하여 보기 좋게 접시에 담아두며, 모두 네 접시를 장만한다. 채소는 무채, 포는 대구포이며 역시 각각 네개를 장만한다. 두부전이나 과자 등은 올리지 않는다. 술은 청주를 사용한다. 소를 제외한 다른 제물은 도가가 제관 한 명을 대동하여 시장을 보아 장만한 것이다.

7. 제의 절차 : [금줄](/topic/금줄)은 제일 사흘 전에 친다. 금줄은 물에 적신 짚으로 왼새끼를 꼬고 사이사이에 [한지](/topic/한지)를 잘라 넣어 만들며, 도가가 직접 만들기도 하지만 짚만 제관에게 나누어 주어 직접 꼬라고 한 적도 있다. 서낭당과 해성당에 먼저 금줄을 치며 도가·제관들 집에도 친다. 이때 금줄과 함께 [황토](/topic/황토)도 깔아둔다. 제물은 유사가 제사 전날 시장에나가서 사 온다. 날이 어두워지면 양초를 밝힌다. 0시가 되면 서낭제의를 시작하며, 보통 40여 분 진행된다. 이후 해성당으로 옮겨 가서 제의를 행하는데, 모두 끝나면 새벽 1시가 넘는다.
제관들은 제당에 들어가기 전에 짚불로 부정을 친다. 이것은 제당 주위를 짚불로 밝혀 돌아다닌 다음 제관들이 짚불을 타 넘어 제당으로 들어가는 행위이다. 제당에 제물을 진설한 다음 도가가 [헌작](/topic/헌작) 후 삼배를 한다. 뒤를 이어 다른 제관들은 합동으로 삼배를 한다. 이후 축관이 고축하고 모든 제관이 합동으로 삼배를 한다. 이후 도가가 동네를 대표하여 조상소지, [서낭신](/topic/서낭신)소지, 거리신소지, 토지신소지 순으로 올린 다음 도가소지, 제관소지, 동네기관장소지(통장, 어촌계장)를 올린다. 이후 제관 세 명이 7개 반을 나누어 각기 마을 어른들의 소지를 올린다. 소지가 끝나면 퇴잔한다. 퇴잔은 제사 후 제사상의 음식을 조금씩 뜯어내 손 없는 방향에 묻어 두는 것을 말하며, 잡귀들이 먹고 가라는 뜻이다. 이후에 [음복](/topic/음복)을 하고는 도가와 제관 한 명이 곧장 해성당으로 이동하여 해성지신을 모신다. 이들이 올 동안 나머지 제관들은 서낭당을 지킨다. 해성당의 제물은 서낭제과 동일하게 별도로 장만하여 제의를 행한다. 해성당 제사는고축 없이 진행된다. 도가가 삼배를 먼저 하고 도가와 제관이 함께 삼배한다. 이후 도가가 해성지신소지를 올리는데, 다른 소지는 없다. 이후 [제상](/topic/제상)의 음식을 조금씩 덜어내어땅에 묻는 퇴잔을 하고 마친다.
한편, 해성당 제의를 마친 도가와 제관이 서낭당으로 돌아오면 모든 제관들이 제물을 분배하고 마을로 돌아간다. 제사에 사용한 제물은 제관들이 모두 가져가는 것이 마을의전통이다. 그러나 쇠고기는 반별로 분배한다.
이렇게 행하는 서낭제는 외부에 일절 공개하지 않으나 해성제는 공개하고 있다.

8. [영험담](/topic/영험담) : ① 서낭당은 [명당](/topic/명당)이라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하나 둘 제당 주변에 묘를 썼다. 그런데 묘를 쓴 집안에서 우환이 생기기 시작했다. 묘를 잘못 썼다 하고 이장(移葬)을 하였다. ② 제당 주변에 향나무가 있으며, 50여 년 전에 이 향나무를 베어간 이가 탈이 나 죽을 뻔했다. ③ 25년 전에 김씨가 죽은 개를 보고는 마을제사에서 소 잡는 것을 도와 준 적이 있다. 그때 제사에 사용하기도 전에 쇠고기를 먹었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④ 20여 년 전에도 소를 잡을 때 돕고 나서 쇠고기를 몰래 가져와 먹다가 죽었다.그래서 이제는 제관, 제집사를 제외한 이들의 출입을 엄금한다.

9. 기타 : 제사에 사용하는 비용은 마을기금으로 충당한다. 동해시쓰레[기장](/topic/기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어촌계에서 공동어장이 있어 전복양식 등을 하여 마련했다. 바다가 황폐화될 무렵에 동해시쓰레기매립장이 대진동에 들어서게 되면서 이 매립장과 관련해서 발생하는 동해시 수입금의 일부를 보상금으로 받는 것을 마을 기금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매년 쓰레기봉투를 무상으로 제공받고, 쓰레기봉투를 판매해서 나오는 수익금의 10%를 보상금으로 받는데, 약 1억 원이다. 그런데 보상금은 5월에 집행되고 서낭제는 정월에 지내야 하기 때문에 정월에 일부 집행할 수 있도록 시에 협조를 요청하여 가불을 받아 서낭제를 치른다. 비용은 보통 1,000만 원(굿을 안 할 경우)에서 3,000만 원(굿을 할 경우)정도 소요된다. 이 밖에 도가와 제관에게 주는 수고비도 있다. 굿을 할 경우에는 도가 60만 원, 제관 10만 원을 받는다. 굿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도가 30만 원, 제관 5만 원이다. 이런 비용들을 정리해 놓은 장부는 통장이 보관하고 있다. 보통 제사를 마치고 날이 밝으면 ‘하기를 닦는다’고 하여 마을총회를 연다.

10. 재고사 : 대진동은 도신제(서낭제와 해성제)가 끝나면 삼월에 재고사를 지낸다. 재고사는 부정이 발생하든 하지 않든 무조건 지내며, 삼월 중의 한 날을 별도로 받아 지냈다. 장소는 서낭당과 해성당??제와 동일하게 성황지신, 토지지신, 거리지신, 해성지신 등 4위이다. 도가 및 제관은 정월에 행했던 제관들과 동일하다. 소를 잡는 대신 쇠고기를 100근 정도 구입하여 사용하지만 나머지 제물은 정월 제물과 동일하다. 제의의 절차는 도신제와 동일하다. 재고사를 지내는 이유는 대보름 제사 후 아무 탈 없이 신들이 잘 돌봐 주어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잘 돌봐 달라는 뜻에서 올리는 것이라고 한다.
참고문헌동해시 역사와 문화유적 (관동대학교박물관, 1996)
동해시의 어로문화 (장정룡·양언석, 동해시, 2000)
동해안 어촌 당신화연구 (이승철, 민속원, 2004)
동해시 대진동 대진[마을](/topic/마을) 도신제 (이승철, 한국의 마을신앙상, 국립민속박물관, 2007)
동해시서낭제 (이한길, 민속원, 2010)
역사대진은 옛날부터 큰 나루가 있다고 하여 대진(大津)이라 했다. 1910년대 초반의 자료인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한글로 ‘한진’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한진(韓津, 寒津)이란 지명은 상당히 오랫동안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topic/마을)에 가장 먼저 들어온 성씨는 황씨 또는 김씨라고 하며, 황씨가 들어온 지는 적어도 350년이된다고 한다. 굿을 할 때 황, 김, 채 3성씨를 초들어야 [신대](/topic/신대)에 신이 내렸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이 3성씨가 마을과 관련이 있고, 서낭제 역시 이들이 마을에 들어온 시점부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대진은 옛날부터 큰 나루가 있다고 하여 대진(大津)이라 했다. 1910년대 초반의 자료인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한글로 ‘한진’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한진(韓津, 寒津)이란 지명은 상당히 오랫동안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topic/마을)에 가장 먼저 들어온 성씨는 황씨 또는 김씨라고 하며, 황씨가 들어온 지는 적어도 350년이된다고 한다. 굿을 할 때 황, 김, 채 3성씨를 초들어야 [신대](/topic/신대)에 신이 내렸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이 3성씨가 마을과 관련이 있고, 서낭제 역시 이들이 마을에 들어온 시점부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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