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모시기

한국무속신앙사전
가정의 안과태평과 자식들의 소원성취 및 복록을 기원하기 위해 [조상신](/topic/조상신)령을 [가신](/topic/가신)으로 모시는 의례. 주부가 주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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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안과태평과 자식들의 소원성취 및 복록을 기원하기 위해 [조상신](/topic/조상신)령을 [가신](/topic/가신)으로 모시는 의례. 주부가 주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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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찬
정의가정의 안과태평과 자식들의 소원성취 및 복록을 기원하기 위해 [조상신](/topic/조상신)령을 [가신](/topic/가신)으로 모시는 의례. 주부가 주관한다.
정의가정의 안과태평과 자식들의 소원성취 및 복록을 기원하기 위해 [조상신](/topic/조상신)령을 [가신](/topic/가신)으로 모시는 의례. 주부가 주관한다.
내용민속시낭상의 조상모시기는 장주근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topic/사전)』의 [조상숭배](/topic/조상숭배)에서 “유교제례의[사당](/topic/사당) 신주격인 조상당세기와 [세존단지](/topic/세존단지)가 [가지](/topic/가지)는 삼국시대․고려시대의 불교적인 성격 그리고 [조상신](/topic/조상신)․여신․농신성을 겸한 보다 원초적인 관념들로 조상숭배 형태가 있었지만 일반적인 신앙형태로 전승하는 사례는 찾기 어렵고 지금까지 보고자료도 거의 없다.”라고 언급하였듯이, 문헌상 민속신앙에서 조상모시기의 보고자료는 없다고 하겠다.

민속신앙에서 모셔지는 조상은 [종가](/topic/종가)에서만 모시지 않는다. 지역과 가정에 따라 신체(神體), 명칭, 모시게 된 동기나 연유도 다르다. 집안에 우환이 있거나 자식들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무당이나 점바치(점쟁이) 또는 승려에게 가서 물어보면 자식 없이 죽은 몇 대의 조상, 제삿밥을 얻어먹지 못하는 조상, 한 많게 죽은 떠돌이 조상, 집안을 위해 헌신한 조상, 소생 없이 일찍 죽은 전처를 조령으로 모시면 좋을 것이라 하여 조상모시기를 한다. 그 조상을 주부가 주관하여 단지나 바가지를 마련하여 햅쌀을 넣고 모시는 단지(동이)류나 바가지류가 있다. 주로 시월상달의 길일이나 섣달그믐께 주부가 몸을 깨끗이 하고 새 옷을 갈아입은 뒤 단지에 묵은쌀을 햅쌀로 갈아 넣은 다음 [제상](/topic/제상)에 메, 나물 세 가지, [정화수](/topic/정화수)를 단지 앞에 차리고 [비손](/topic/비손)을 한다. 그리고 묵은쌀로 밥을 지어 집안 식구끼리만 먹고 남에게는 주지 않는다. 단지나 바가지를 없앨 때는 무당이나 점바치에게 문복하여 시키는 대로 하거나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에 버린다. 단지를 모시던 주부가 죽으면 상여 뒤에 달고 가다가 깨뜨리거나 바가지의 경우 밟아서 부순다.
내용민속시낭상의 조상모시기는 장주근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topic/사전)』의 [조상숭배](/topic/조상숭배)에서 “유교제례의[사당](/topic/사당) 신주격인 조상당세기와 [세존단지](/topic/세존단지)가 [가지](/topic/가지)는 삼국시대․고려시대의 불교적인 성격 그리고 [조상신](/topic/조상신)․여신․농신성을 겸한 보다 원초적인 관념들로 조상숭배 형태가 있었지만 일반적인 신앙형태로 전승하는 사례는 찾기 어렵고 지금까지 보고자료도 거의 없다.”라고 언급하였듯이, 문헌상 민속신앙에서 조상모시기의 보고자료는 없다고 하겠다.

민속신앙에서 모셔지는 조상은 [종가](/topic/종가)에서만 모시지 않는다. 지역과 가정에 따라 신체(神體), 명칭, 모시게 된 동기나 연유도 다르다. 집안에 우환이 있거나 자식들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무당이나 점바치(점쟁이) 또는 승려에게 가서 물어보면 자식 없이 죽은 몇 대의 조상, 제삿밥을 얻어먹지 못하는 조상, 한 많게 죽은 떠돌이 조상, 집안을 위해 헌신한 조상, 소생 없이 일찍 죽은 전처를 조령으로 모시면 좋을 것이라 하여 조상모시기를 한다. 그 조상을 주부가 주관하여 단지나 바가지를 마련하여 햅쌀을 넣고 모시는 단지(동이)류나 바가지류가 있다. 주로 시월상달의 길일이나 섣달그믐께 주부가 몸을 깨끗이 하고 새 옷을 갈아입은 뒤 단지에 묵은쌀을 햅쌀로 갈아 넣은 다음 [제상](/topic/제상)에 메, 나물 세 가지, [정화수](/topic/정화수)를 단지 앞에 차리고 [비손](/topic/비손)을 한다. 그리고 묵은쌀로 밥을 지어 집안 식구끼리만 먹고 남에게는 주지 않는다. 단지나 바가지를 없앨 때는 무당이나 점바치에게 문복하여 시키는 대로 하거나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에 버린다. 단지를 모시던 주부가 죽으면 상여 뒤에 달고 가다가 깨뜨리거나 바가지의 경우 밟아서 부순다.
역사조상모시기는 크게 유교식 조상모시기와 민속신앙으로서의 조령 모시기로 나눌 수 있다. 유교식 조상모시기의 유래에 대해서는 옛 문헌에서 찻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제8 신문왕 조에 따르면 신문왕 2년에 국학을 설치하고 6년에 당으로부터 『[예기](/topic/예기)(禮記)』가 들어옴으로써 조상모시기가 제도화되기 시작하였다. 『고려사(高麗史)』 권95 열전권제8 최윤의(崔允儀) 조와 『동국이상국후집』 권11 서(序) 신서상정예문발미(新序詳定禮文跋尾) 조에 따르면 인종의 명을 받아 최윤의 등 17명이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 50권을 내었고, 후기에는 안향(安珦)이 중국에서 성리학을 유입하였다. 『고려사』 118 열전권 제31 조준 조에 따르면 집이 있는 자들은 모두 반드시 신사(神祠)를 세워놓고 이것을 [위호](/topic/위호)(衛護)라 하였다. 위호는 조상의 신위를 무당에게 맡기고 노비와 재물을 주어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고려사』 63 지권 제17 예5 대부사서인제례(大夫士庶人祭禮) 조와 『고려사』 117 열전권 제30 정몽주 조에 따르면 공양왕 2년 2월에 정몽주가 비로소 일반 양반이나 서민들로 하여금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거하여 가묘(家廟)를 세우고 조상에게 제사 드리게 건의하였으며, 동왕 3년 6월 기사일에 가묘에 관한 법을 실행할 것을 명령하였다. 즉 대부 이상은 위로 3대, 6품 이상은 위로 2대, 7품 이하 서인에 이르기까지는 그 부모만을 각각 제사하도록 하였다. 1485년(조선 성종 16)에 나온 『경국대전(經國大典)』 권지3 예전(禮典) 봉사(奉祀) 조에는 문무관 6품 이상은 3대, 7품 이하는 2대, 서인은 부모만 각각 제사하게 하였다. 그 후 『주자가례』가 널리 보급되자 그에 따라 명종조 이후에는 서인에 이르기까지 4대조 봉사나 3대조 봉사가 일반화되었다. 이때부터 조상모시기는 종손으로 계승되었다. [사당](/topic/사당)도 종손 집에 세워 [감실](/topic/감실)에 4대 또는 3대 신주를 모셨다. 살림이 빈곤한 가정에서는 벽감(壁龕)을 만들어 신주를 모셨다. 그러나 조선사회는 반상의 차별이 심했기 때문에 서인은 사당이나 벽감을 만들 수 없어서 조상당세기나 귀신종이로 대체하여 모셨다. 벽감마저 만들 수 없는 서인의 가정에서는 [안방](/topic/안방)의 [시렁](/topic/시렁)이나 안방의 한 구석의 높은 곳에 판을 만들어 대수(代數)에 따라 [고비](/topic/고비)합사(考妣合祀)로 4개, 고비별로 8개의 조상당세기(귀신당세기) 또는 귀신동이를 얹어 놓거나 귀신종이([조상종이](/topic/조상종이))를 조상 수대로 벽에 붙여 두었다. 귀신당세기에는 조상의 신위를 쓴 종이 또는 [한지](/topic/한지)를 몇 겹으로 접어 넣거나 천 조각, 삼오라기, 면화 뭉치 등을 넣어 두었다. 귀신동이에는 쌀과 그 위에 지방(紙榜)을 쓴 종이나 아무런 글씨도 쓰지 않은 종이를 넣어서 한지로 동이를 봉하고 왼새끼나 [실타래](/topic/실타래)로 둘러 묶은 다음 뚜껑을 덮어 두었다. 의례는 설, 추석, 동짓날,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간단하게 제물을 차려 위하였다. 조상 기일에는 제물을 풍부하게 차려 제사를 치렀다. 이는 유교식 4대 봉사가 민속신앙으로 변천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조상모시기는 크게 유교식 조상모시기와 민속신앙으로서의 조령 모시기로 나눌 수 있다. 유교식 조상모시기의 유래에 대해서는 옛 문헌에서 찻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제8 신문왕 조에 따르면 신문왕 2년에 국학을 설치하고 6년에 당으로부터 『[예기](/topic/예기)(禮記)』가 들어옴으로써 조상모시기가 제도화되기 시작하였다. 『고려사(高麗史)』 권95 열전권제8 최윤의(崔允儀) 조와 『동국이상국후집』 권11 서(序) 신서상정예문발미(新序詳定禮文跋尾) 조에 따르면 인종의 명을 받아 최윤의 등 17명이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 50권을 내었고, 후기에는 안향(安珦)이 중국에서 성리학을 유입하였다. 『고려사』 118 열전권 제31 조준 조에 따르면 집이 있는 자들은 모두 반드시 신사(神祠)를 세워놓고 이것을 [위호](/topic/위호)(衛護)라 하였다. 위호는 조상의 신위를 무당에게 맡기고 노비와 재물을 주어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고려사』 63 지권 제17 예5 대부사서인제례(大夫士庶人祭禮) 조와 『고려사』 117 열전권 제30 정몽주 조에 따르면 공양왕 2년 2월에 정몽주가 비로소 일반 양반이나 서민들로 하여금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거하여 가묘(家廟)를 세우고 조상에게 제사 드리게 건의하였으며, 동왕 3년 6월 기사일에 가묘에 관한 법을 실행할 것을 명령하였다. 즉 대부 이상은 위로 3대, 6품 이상은 위로 2대, 7품 이하 서인에 이르기까지는 그 부모만을 각각 제사하도록 하였다. 1485년(조선 성종 16)에 나온 『경국대전(經國大典)』 권지3 예전(禮典) 봉사(奉祀) 조에는 문무관 6품 이상은 3대, 7품 이하는 2대, 서인은 부모만 각각 제사하게 하였다. 그 후 『주자가례』가 널리 보급되자 그에 따라 명종조 이후에는 서인에 이르기까지 4대조 봉사나 3대조 봉사가 일반화되었다. 이때부터 조상모시기는 종손으로 계승되었다. [사당](/topic/사당)도 종손 집에 세워 [감실](/topic/감실)에 4대 또는 3대 신주를 모셨다. 살림이 빈곤한 가정에서는 벽감(壁龕)을 만들어 신주를 모셨다. 그러나 조선사회는 반상의 차별이 심했기 때문에 서인은 사당이나 벽감을 만들 수 없어서 조상당세기나 귀신종이로 대체하여 모셨다. 벽감마저 만들 수 없는 서인의 가정에서는 [안방](/topic/안방)의 [시렁](/topic/시렁)이나 안방의 한 구석의 높은 곳에 판을 만들어 대수(代數)에 따라 [고비](/topic/고비)합사(考妣合祀)로 4개, 고비별로 8개의 조상당세기(귀신당세기) 또는 귀신동이를 얹어 놓거나 귀신종이([조상종이](/topic/조상종이))를 조상 수대로 벽에 붙여 두었다. 귀신당세기에는 조상의 신위를 쓴 종이 또는 [한지](/topic/한지)를 몇 겹으로 접어 넣거나 천 조각, 삼오라기, 면화 뭉치 등을 넣어 두었다. 귀신동이에는 쌀과 그 위에 지방(紙榜)을 쓴 종이나 아무런 글씨도 쓰지 않은 종이를 넣어서 한지로 동이를 봉하고 왼새끼나 [실타래](/topic/실타래)로 둘러 묶은 다음 뚜껑을 덮어 두었다. 의례는 설, 추석, 동짓날,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날에 간단하게 제물을 차려 위하였다. 조상 기일에는 제물을 풍부하게 차려 제사를 치렀다. 이는 유교식 4대 봉사가 민속신앙으로 변천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역사례함경도지역에서는 집안의 성주단지 옆에 귀신동이([조상단지](/topic/조상단지))를 여러 개 늘어놓는다. 귀신동이는 4대조 이하의 조상을 의미한다. [부엌](/topic/부엌)이나 뒤고방에 선반을 매고 여러 개의 귀신동이를 모신다. 신체인 귀신동이 안에는 [삼베](/topic/삼베) 한 필을 담아 놓는다. 평상시에도 옷감을 사오면 가로 2㎝, 세로 5㎝ 정도로 오려서 넣는다. 제일은 일정하지 않지만 보통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유월유두, 칠월칠석, 팔월 한가위이다. 제사는 주부가 진행한다. 일반적으로 메, 떡, 과일, 나물, 생선, 술 등 제물을 동이 앞에 진설하고 [비손](/topic/비손)으로 가족들의 수명장수를 축원한다.

강원도 양구군 남면 구암리의 한 가정에서는 조상단지를 신체로 모신다. 이는 집안에 탈이 나서 점을 치거나 물었을 때 “집안 조상 중에 누가 모셔주기를 바란다.”라고 할 경우 집안이 잘되게 해달라고 단지를 모신다. 단지는 사람의 출입이 적은 곳에 두며, 그 안에는 쌀을 넣어둔다. 밖에서 음식이나 돈이 들어오면 단지 앞에 먼저 가져다 두고 아뢴 다음 가족들이 가져다 쓴다. 천이 들어오는 경우 천을 조금 잘라서 단지 안에 넣고 사용한다. 중요한 일이 있는 날에는 먼저 밥을 가져다 두고 위한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지석리 방복례(여, 1936년생)씨 댁에서는 벼슬대감을 모신다. 과거에 벼슬한 조상이 좌정한 신령이다. [벙거지](/topic/벙거지)와 [쾌자](/topic/쾌자)를 각각 [한지](/topic/한지)로 싸서 포개어 [대청](/topic/대청)의 왼쪽 벽 상단에 선반을 매고 그 위에 올려놓았다. 주부가 9월 [가을고사](/topic/가을고사) 때 [시루떡](/topic/시루떡), 돼지머리, 무나물, 술을 [제상](/topic/제상)에 차려 지낸다.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에서 모시는 [조상신](/topic/조상신)은 후손을 보살펴주는 신이다. 자리는 [안방](/topic/안방)의 [윗목](/topic/윗목) 벽 밑이다. 대체로 신체가 없는 조상이다. 그러나 금당골의 이기순(여, 1940년생)씨 댁에서는 시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안방 [다락](/topic/다락) 안에 오지항아리를 놓고 그 안에 쌀과 그 위에 흰 [명주](/topic/명주) [두루마기](/topic/두루마기)를 종이상자에 넣어 놓았다. 이것이 조상의 신체였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자리걷이](/topic/자리걷이)’를 하면서 태워없앴다고 한다.

경북 영덕군 영해면 사진1리에 사는 윤순이(여, 1921년생)씨 댁에는 안방 [시렁](/topic/시렁)에 신체로서 조상당세기 두 개가 옆으로 나란히 얹혀 있다. 왼쪽 당세기에는 시조부모, 오른쪽 당세기에는 시부모와 남편을 각각 모셨다. 두 당세기 위에는 접은 [광목](/topic/광목)이 켜켜이 얹혀 있다. 이는 후손이 결혼할 때 예단으로 천을 끊어 얹은 것이다. 상을 당하면 당세기를 구입하여 무당을 불러 조상을 앉혔다. 이때 당세기 안에는 죽은 이의 성명과 생몰 연월일을 한지에 기록하여 넣고, 제물을 간단히 차려 제사를 지냈다. 그 뒤 특별히 위하는 일은 없고 제삿날과 명절에만 메와 탕, 나물, 고기자반 등을 차려 올릴 뿐이다. 고령군 덕곡면 후암리 지사[마을](/topic/마을)의 김오분(여, 1924년생)씨 댁에서는 조상단지를 ‘[시주](/topic/시주)할매단지’라고 한다. 10월 초순의 길일을 택해 단지에 햅쌀을 갈아 넣는다. 단지에 있던 묵은 쌀로 밥을 해먹을 때는 육고기나 물고기 같은 비린 반찬은 하지 않고 김치, 나물, [된장](/topic/된장)으로 찬을 해서 먹는다. 김씨 할머니가 외출하였다가 돌아오면 먼저 단지에게 “시주할매, 우야든지 아들 건강하고 재수 소망 있게 해 주이소. 나 어디에 갔다 왔습니다.”라고 이령수를 한다. 설에는 떡국 한 그릇과 술 한 잔으로 상을 차리고 “일 년 열두 달 잘 넘어가고 자손들 건강하고 명 길게 해 주이소.”라고 이령수를 한다. 동짓날에는 팥죽을 쑤어 단지 앞에 놓고 고한다. 그밖에 집에서 특별한 음식을 하더라도 단지 앞에 차려놓고 고한 다음 먹는다.

경남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중촌마을의 김수조(여, 1931년생)씨 댁에서는 조상단지를 모시고 가정의 안과태평과 자녀들의 소원성취 및 풍요를 위한다. 신체는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를 조령으로 [봉안](/topic/봉안)한 것으로, 안방 [장롱](/topic/장롱) 위에 모셔두었다. 이 댁에서 조상단지를 모시게 된 연유는 김씨 할머니가 시집온 뒤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자 시어머니가 무당을 찾아 점을 보니 시할머니를 조상단지에 모셔 섬기면 집안이 편안해질 것이라 해서 모시게 된 것이다. 그 후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할머니와 함께 모셨다고 한다. 조상단지에 대한 의례는 매년 시월의 길일을 택해 단지 안의 쌀을 교체할 때 간단하게 [정화수](/topic/정화수)만 떠놓고 절을 서너 차례 올린 뒤 비손을 한다. 소지는 하지 않는다. 단지에서 꺼낸 묵은쌀은 밥을 지어 식구들끼리 먹고 남에게는 주지 않는다.

충남 보령시 오천면 원산도리 저두마을의 한 가정에서는 죽은 시어머니를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건넌방](/topic/건넌방)의 오른쪽 벽면에 선반을 매고 그 위에 그릇 셋을 가로로 [가지](/topic/가지)런히 놓아두었다. 왼쪽으로부터 [실타래](/topic/실타래) 그릇․정화수 그릇, 쌀 사발을 신체로 하고 있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정화수를 갈아놓고 촛불을 밝힌다. 과일이나 특별한 음식을 사오면 먹기 전에 미리 이곳에 올려두었다가 먹는다. 돈이 들어오면 이곳에 놓고 재배한 뒤에 쓴다. 설, 정월대보름, 추석, 동지 때에는 집안의 조상을 비롯하여 성주와 시어머니 조상을 함께 위한다. 다른 날에는 제사를 지내듯 제물을 장만하지만 동짓날에는 정화수만 떠놓는다. 이렇게 조상을 위하면 자식들이 편하고 좋아진다고 한다. 보령시 삽시도의 일부 가정에서는 웃줄할아버지를 모신다. 집안의 안과태평과 자손의 수명장수를 위해 모신다. 신체는 조그마한 상자 안에 남자 [한복](/topic/한복) 한 벌을 넣고 봉한 것이다. 이 상자를 안방의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다른 사람은 일절 열어보지 못한다. 웃줄할아버지의 생신이 음력 시월이라 하여 이 달 중에 택일하여 간단한 제물을 올리고 자손들 잘되라고 비손한다. 옷이 낡아지면 새 옷으로 갈아준다. [안택](/topic/안택)할 때나 명절 때도 웃줄할아버지상을 따로 차린다.

전북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 상동마을에서는 주로 젊었을 때 죽은 조상이 집안에 해를 끼치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조그만 단지를 마련하여 모시고 있다. 단지의 쌀을 갈 때는 떡을 하고 묵을 쒀서 집안 사방에 놓아둔 다음 쌀을 간다.

전남 무안군 무안읍 성남리 대곡마을에 사는 김상례(여, 1930년생)씨 댁에서는 조왕산기라 하는 석짝(고리)을 안방의 시렁 위에 올려놓고 그 안에 조상들의 이름을 써서 담아 두었다. 보성군 득량면 해평리 조[양마](/topic/양마)을에 사는 김낭례(여, 1923년생)씨 댁에서는 신주단지라 하면서 단지가 아니라 한지로 만든 네모 곽(상자)을 선반 위에 올려두었다. 그 안에는 쌀을 세 주먹만 넣고 그 위에 시증조부모의 이름을 적은 지방을 얹어 두었다. 원래 시할머니가 모시던 것을 시어머니가 이어받아 모셨다. 그러다가 [이사](/topic/이사) 갈 때 신주단지를 태웠다. 보성군 미력면 화방리 장동마을에 사는 위포남(여, 1933년생)씨 댁에서는 지왕오가리를 모신다. 지왕오가리는 쌀 두되 반이 들어가는 크기의 옹기이다. 매년 농사를 지어서 쌀을 찧으면 초열흘이나 스무날 등 손이 없는 좋은 날을 받아 새 쌀을 지왕오가리에 담는다. 지왕오가리에 들어 있는 쌀은 함부로 손을 못 댄다. 여름에 양식이 없어 곤란할 때는 깨끗한 날에 꺼내 밥을 지어 시부모를 공양한다. 오가리에서 쌀을 내어 해먹다가도 마을에 초상이 나면 중단한다. 공을 드린 쌀은 시장에다 내다 팔면 안 되고 집에서만 해먹어야 한다. 그 쌀로 밥을 해서 먹을 때 삼년 복을 입은 사람은 먹어서는 안 된다. 시어머니가 지왕오가리를 모시게 된 이유는 시어머니가 재취로 시집을 왔는데 전처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재취로 온 시어머니가 살다가 어느 날 점을 보니 ‘전처가 너무 일찍 죽어 억울하니 위해주라’는 괘가 나왔다. 그때부터 지왕오가리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지왕오가리에는 쌀 외에 다른 것을 넣지 않는다.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의 심방이 구송하는 에 따르면 성주 이씨의 집안에서는 수호신격으로 조상 이만경을 위하고 있고, 에 따르면 파평 윤씨의 집안에서는 수호신격으로 조상 윤대정을 섬기고 있다. 심방이 구송하는 에 따르면 제주 양씨 가운데 명월파 집안에서는 불운하게 죽은 조상 양목사를 집안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고 한다. 에 따르면 나주 김씨의 어느 선조로부터 부신(富神)적 성격의 조상에 구슬할망신을 모신다. 구슬할망이 죽을 때 딸 아홉에게 “너희들은 명절이나 기일제사 때 고팡에 상을 차리고 나를 위해주면 잘살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 뒤 딸들은 아홉 마을에 시집가서 명절이나 제사 때마다 고팡에 상을 차려 위하게 되었고, 점차로 딸 자손의 줄이 뻗어갔다. 이 구슬할망은 그 자손을 번창하게 해주는 조상신이 된 것이다. 서귀포시 남원읍 예촌(신례리와 하례리)의 양씨 댁에는 처녀의 몸으로 죽은 조령(祖靈)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고 한다.
참고문헌제주도 무속연구 (현용준, 집문당, 1986)
위도의 민속 (국립민속박물관, 1987)
한국가족제도연구 (김두헌, 서울대학교출판부, 1989)
풍기의 민속종교와 신앙생활 (김명자, 민속연구 3, 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 1993)
함경도의 민속 (전경욱, 고려대학교출판부, 1999)
제주도 제주사]람 (김영돈, 민속원, 200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topic/사전) (동방미디어, 2002)
부산의 민속문화 (황경숙, 세종출판사, 2003)
한국의 가정신앙-하 (김명자 외, 민속원, 2005)
한국의 가정신앙 (국립문화재연구소, 2005~2008)
창포[마을](/topic/마을)의 가정신앙 (김명자, 농사짓다 고기잡는 창포마을의 민속, 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 민속원, 2008)
三國史記, 高麗史, 經國大典, 東國李相國集, 강화의 가정신앙 1․2 (강화문화원 가정신앙조사단, 민속원, 2010)
남도민속학 (표인주, 전남대학교출판부, 2010)
지역사례함경도지역에서는 집안의 성주단지 옆에 귀신동이([조상단지](/topic/조상단지))를 여러 개 늘어놓는다. 귀신동이는 4대조 이하의 조상을 의미한다. [부엌](/topic/부엌)이나 뒤고방에 선반을 매고 여러 개의 귀신동이를 모신다. 신체인 귀신동이 안에는 [삼베](/topic/삼베) 한 필을 담아 놓는다. 평상시에도 옷감을 사오면 가로 2㎝, 세로 5㎝ 정도로 오려서 넣는다. 제일은 일정하지 않지만 보통 [정월대보름](/topic/정월대보름), 유월유두, 칠월칠석, 팔월 한가위이다. 제사는 주부가 진행한다. 일반적으로 메, 떡, 과일, 나물, 생선, 술 등 제물을 동이 앞에 진설하고 [비손](/topic/비손)으로 가족들의 수명장수를 축원한다.

강원도 양구군 남면 구암리의 한 가정에서는 조상단지를 신체로 모신다. 이는 집안에 탈이 나서 점을 치거나 물었을 때 “집안 조상 중에 누가 모셔주기를 바란다.”라고 할 경우 집안이 잘되게 해달라고 단지를 모신다. 단지는 사람의 출입이 적은 곳에 두며, 그 안에는 쌀을 넣어둔다. 밖에서 음식이나 돈이 들어오면 단지 앞에 먼저 가져다 두고 아뢴 다음 가족들이 가져다 쓴다. 천이 들어오는 경우 천을 조금 잘라서 단지 안에 넣고 사용한다. 중요한 일이 있는 날에는 먼저 밥을 가져다 두고 위한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지석리 방복례(여, 1936년생)씨 댁에서는 벼슬대감을 모신다. 과거에 벼슬한 조상이 좌정한 신령이다. [벙거지](/topic/벙거지)와 [쾌자](/topic/쾌자)를 각각 [한지](/topic/한지)로 싸서 포개어 [대청](/topic/대청)의 왼쪽 벽 상단에 선반을 매고 그 위에 올려놓았다. 주부가 9월 [가을고사](/topic/가을고사) 때 [시루떡](/topic/시루떡), 돼지머리, 무나물, 술을 [제상](/topic/제상)에 차려 지낸다.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에서 모시는 [조상신](/topic/조상신)은 후손을 보살펴주는 신이다. 자리는 [안방](/topic/안방)의 [윗목](/topic/윗목) 벽 밑이다. 대체로 신체가 없는 조상이다. 그러나 금당골의 이기순(여, 1940년생)씨 댁에서는 시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안방 [다락](/topic/다락) 안에 오지항아리를 놓고 그 안에 쌀과 그 위에 흰 [명주](/topic/명주) [두루마기](/topic/두루마기)를 종이상자에 넣어 놓았다. 이것이 조상의 신체였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자리걷이](/topic/자리걷이)’를 하면서 태워없앴다고 한다.

경북 영덕군 영해면 사진1리에 사는 윤순이(여, 1921년생)씨 댁에는 안방 [시렁](/topic/시렁)에 신체로서 조상당세기 두 개가 옆으로 나란히 얹혀 있다. 왼쪽 당세기에는 시조부모, 오른쪽 당세기에는 시부모와 남편을 각각 모셨다. 두 당세기 위에는 접은 [광목](/topic/광목)이 켜켜이 얹혀 있다. 이는 후손이 결혼할 때 예단으로 천을 끊어 얹은 것이다. 상을 당하면 당세기를 구입하여 무당을 불러 조상을 앉혔다. 이때 당세기 안에는 죽은 이의 성명과 생몰 연월일을 한지에 기록하여 넣고, 제물을 간단히 차려 제사를 지냈다. 그 뒤 특별히 위하는 일은 없고 제삿날과 명절에만 메와 탕, 나물, 고기자반 등을 차려 올릴 뿐이다. 고령군 덕곡면 후암리 지사[마을](/topic/마을)의 김오분(여, 1924년생)씨 댁에서는 조상단지를 ‘[시주](/topic/시주)할매단지’라고 한다. 10월 초순의 길일을 택해 단지에 햅쌀을 갈아 넣는다. 단지에 있던 묵은 쌀로 밥을 해먹을 때는 육고기나 물고기 같은 비린 반찬은 하지 않고 김치, 나물, [된장](/topic/된장)으로 찬을 해서 먹는다. 김씨 할머니가 외출하였다가 돌아오면 먼저 단지에게 “시주할매, 우야든지 아들 건강하고 재수 소망 있게 해 주이소. 나 어디에 갔다 왔습니다.”라고 이령수를 한다. 설에는 떡국 한 그릇과 술 한 잔으로 상을 차리고 “일 년 열두 달 잘 넘어가고 자손들 건강하고 명 길게 해 주이소.”라고 이령수를 한다. 동짓날에는 팥죽을 쑤어 단지 앞에 놓고 고한다. 그밖에 집에서 특별한 음식을 하더라도 단지 앞에 차려놓고 고한 다음 먹는다.

경남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중촌마을의 김수조(여, 1931년생)씨 댁에서는 조상단지를 모시고 가정의 안과태평과 자녀들의 소원성취 및 풍요를 위한다. 신체는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를 조령으로 [봉안](/topic/봉안)한 것으로, 안방 [장롱](/topic/장롱) 위에 모셔두었다. 이 댁에서 조상단지를 모시게 된 연유는 김씨 할머니가 시집온 뒤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자 시어머니가 무당을 찾아 점을 보니 시할머니를 조상단지에 모셔 섬기면 집안이 편안해질 것이라 해서 모시게 된 것이다. 그 후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할머니와 함께 모셨다고 한다. 조상단지에 대한 의례는 매년 시월의 길일을 택해 단지 안의 쌀을 교체할 때 간단하게 [정화수](/topic/정화수)만 떠놓고 절을 서너 차례 올린 뒤 비손을 한다. 소지는 하지 않는다. 단지에서 꺼낸 묵은쌀은 밥을 지어 식구들끼리 먹고 남에게는 주지 않는다.

충남 보령시 오천면 원산도리 저두마을의 한 가정에서는 죽은 시어머니를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건넌방](/topic/건넌방)의 오른쪽 벽면에 선반을 매고 그 위에 그릇 셋을 가로로 [가지](/topic/가지)런히 놓아두었다. 왼쪽으로부터 [실타래](/topic/실타래) 그릇․정화수 그릇, 쌀 사발을 신체로 하고 있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정화수를 갈아놓고 촛불을 밝힌다. 과일이나 특별한 음식을 사오면 먹기 전에 미리 이곳에 올려두었다가 먹는다. 돈이 들어오면 이곳에 놓고 재배한 뒤에 쓴다. 설, 정월대보름, 추석, 동지 때에는 집안의 조상을 비롯하여 성주와 시어머니 조상을 함께 위한다. 다른 날에는 제사를 지내듯 제물을 장만하지만 동짓날에는 정화수만 떠놓는다. 이렇게 조상을 위하면 자식들이 편하고 좋아진다고 한다. 보령시 삽시도의 일부 가정에서는 웃줄할아버지를 모신다. 집안의 안과태평과 자손의 수명장수를 위해 모신다. 신체는 조그마한 상자 안에 남자 [한복](/topic/한복) 한 벌을 넣고 봉한 것이다. 이 상자를 안방의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다른 사람은 일절 열어보지 못한다. 웃줄할아버지의 생신이 음력 시월이라 하여 이 달 중에 택일하여 간단한 제물을 올리고 자손들 잘되라고 비손한다. 옷이 낡아지면 새 옷으로 갈아준다. [안택](/topic/안택)할 때나 명절 때도 웃줄할아버지상을 따로 차린다.

전북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 상동마을에서는 주로 젊었을 때 죽은 조상이 집안에 해를 끼치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조그만 단지를 마련하여 모시고 있다. 단지의 쌀을 갈 때는 떡을 하고 묵을 쒀서 집안 사방에 놓아둔 다음 쌀을 간다.

전남 무안군 무안읍 성남리 대곡마을에 사는 김상례(여, 1930년생)씨 댁에서는 조왕산기라 하는 석짝(고리)을 안방의 시렁 위에 올려놓고 그 안에 조상들의 이름을 써서 담아 두었다. 보성군 득량면 해평리 조[양마](/topic/양마)을에 사는 김낭례(여, 1923년생)씨 댁에서는 신주단지라 하면서 단지가 아니라 한지로 만든 네모 곽(상자)을 선반 위에 올려두었다. 그 안에는 쌀을 세 주먹만 넣고 그 위에 시증조부모의 이름을 적은 지방을 얹어 두었다. 원래 시할머니가 모시던 것을 시어머니가 이어받아 모셨다. 그러다가 [이사](/topic/이사) 갈 때 신주단지를 태웠다. 보성군 미력면 화방리 장동마을에 사는 위포남(여, 1933년생)씨 댁에서는 지왕오가리를 모신다. 지왕오가리는 쌀 두되 반이 들어가는 크기의 옹기이다. 매년 농사를 지어서 쌀을 찧으면 초열흘이나 스무날 등 손이 없는 좋은 날을 받아 새 쌀을 지왕오가리에 담는다. 지왕오가리에 들어 있는 쌀은 함부로 손을 못 댄다. 여름에 양식이 없어 곤란할 때는 깨끗한 날에 꺼내 밥을 지어 시부모를 공양한다. 오가리에서 쌀을 내어 해먹다가도 마을에 초상이 나면 중단한다. 공을 드린 쌀은 시장에다 내다 팔면 안 되고 집에서만 해먹어야 한다. 그 쌀로 밥을 해서 먹을 때 삼년 복을 입은 사람은 먹어서는 안 된다. 시어머니가 지왕오가리를 모시게 된 이유는 시어머니가 재취로 시집을 왔는데 전처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재취로 온 시어머니가 살다가 어느 날 점을 보니 ‘전처가 너무 일찍 죽어 억울하니 위해주라’는 괘가 나왔다. 그때부터 지왕오가리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지왕오가리에는 쌀 외에 다른 것을 넣지 않는다.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의 심방이 구송하는 에 따르면 성주 이씨의 집안에서는 수호신격으로 조상 이만경을 위하고 있고, 에 따르면 파평 윤씨의 집안에서는 수호신격으로 조상 윤대정을 섬기고 있다. 심방이 구송하는 에 따르면 제주 양씨 가운데 명월파 집안에서는 불운하게 죽은 조상 양목사를 집안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고 한다. 에 따르면 나주 김씨의 어느 선조로부터 부신(富神)적 성격의 조상에 구슬할망신을 모신다. 구슬할망이 죽을 때 딸 아홉에게 “너희들은 명절이나 기일제사 때 고팡에 상을 차리고 나를 위해주면 잘살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 뒤 딸들은 아홉 마을에 시집가서 명절이나 제사 때마다 고팡에 상을 차려 위하게 되었고, 점차로 딸 자손의 줄이 뻗어갔다. 이 구슬할망은 그 자손을 번창하게 해주는 조상신이 된 것이다. 서귀포시 남원읍 예촌(신례리와 하례리)의 양씨 댁에는 처녀의 몸으로 죽은 조령(祖靈)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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